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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프다는 건 핑계였다. 더 이상 애신의 흔적이 가득한 학교에 남아있을 수 없었다. 옥상에서 내려와 복도를 거닐으니 절로 복도에서 책을 들고 수업을 위해 다른 교실로 이동하던 애신이 아른거렸다. 가방을 챙기다 뒷문을 바라보니 방금 전 저를 불러낸 애신이 선명했다. 동매는 망설임 없이 제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몸이 많이 안 좋아서 집으로 가야할 것 같아요,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던 동매이기에 동매의 어머니는 그를 바로 집으로 불러들였다.

 집에 가자마자 동매는 제 방문을 걸어 잠그고 침대 위로 몸을 내던졌다. 그렇게 내던져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애신을 보지 못할 것을 생각하니 모든 일상에 염증이 났다. 불조차 켜지 않은 채 가만히 침대에 누워 시커먼 천장을 바라보자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작았던 소망이 어느새 커져 욕심이 되고 욕망이 되어 자꾸만 애신을 그리게 만들었다. 애신을 위해서라도 저는 이만 물러나야할 때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게 잘 안됐다. 생을 관통한 사랑은 그토록 지독했다.

 이틀간 동매는 두문불출하며 모두와의 연락을 끊었다. 부모님이 해외출장을 나간 덕에 동매는 홀로 집 안에 틀어박혀있을 수 있었다. 이런 고독이 내게 더 맞겠지, 동매는 천천히 애신을 제 마음 깊숙이에 묻으려 노력했다.

 

 쇼파에 드러누워 다시금 애신에 대한 생각에 잠겨 있던 동매가 울리는 진동에 몸을 일으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고애신, 그 이름을 본 순간 동매는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애써 지우던 욕심이 자꾸만 틈을 비집고 나왔다. 동매는 오랫동안 그 세 글자를 바라보다 꾹, 통화를 끊어버렸다. 이게 맞는 행동일 텐데도 괜스레 짜증이 나 핸드폰을 쇼파 위로 던지니 핸드폰이 불이 날 기세로 울려댔다. 순식간에 문자 세 통이 와 있었다.

 

 

[전화 받아]

[너네 집 찾아간다]

[빨리 받으라고]

 

 

 애신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액정 위로 손가락이 느릿하게 움직이며 그 세 문장을 계속 쓸었다. 곧 다시 걸려온 전화에 동매는 한참이나 망설인 끝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떨리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으니 전화 너머로 긴 한숨이 뱉어졌다. 애신이 분명했다. 동매가 살짝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너 지금 어디야.”

 

“집..”

 

“집이 어딘데.”

 

“서울...”

 

 

뭐 서울? 여기 충청돈데 서울을 언제, 목 끝까지 차오른 말을 애써 삼킨 애신이 다시 깊게 한숨을 뱉음으로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동매가 전화를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할 지경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동매의 목소리가 많이 잠겨있어서 걱정이 앞섰다. 너 내가 다시 전화하면 곱게 받아, 애신이 한 마디를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할아버지 몰래 서울에 다녀오려면 한시라도 바삐 움직여야했다. 시계는 오후 5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뚝 끊긴 전화에 동매는 통화기록만 남은 화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천천히 액정을 엄지로 쓸어내리니 화면 너머로 전해지던 애신의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오는 듯 했다. 뭐지, 앉아있던 긴 소파에 벌러덩 누운 동매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보고 싶다, 고애신. 자꾸만 새어나오는 욕심이 지워낸 제 소망을 꺼내려 들었다. 그녀의 동반자. 그게 정말 되고 싶었다.

 

 

 깊게 잠이 들었던 동매는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에 결국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발신인 고애신. 9시가 다 되어가는 시간이었다. 잠에서 아직 덜 깬 동매가 눈을 찌푸려 발신인을 확인하더니 고개를 흔들어 잠을 몰아내려 들었다. 휴, 한참동안 잠을 깨려 눈을 깜빡이던 동매가 급히 전화를 받으니 전화기 너머로 간신히 말을 뱉어내는 애신이 있었다. 뛰기라도 했는지 헉헉대는 숨소리가 지직거리며 잡음을 계속 만들어냈다.

 

 

“너... 너 몇 호야..”

 

“나 302호..”

 

 

 대답을 듣자마자 전화를 뚝 끊어버리는 애신에 동매가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갸웃거렸다. 뭐지, 잠시 뒤 초인종이 울렸다. 설마, 벌떡 일어난 동매가 제 옷매무새를 급하게 가다듬었다. 어디 이상한 데는 없겠지? 뭐 묻었나, 동매의 당황스러움을 아는지 모르는지 문을 바로 열지 않는 동매에 애신이 현관문을 부술 듯 두드렸다. 문 열어, 낮게 읊조리듯 전해지는 목소리에 동매가 황급히 문을 열었다. 애신은 아직까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차를 타고 왔으면 이렇게 뛰었을 리가 없는데, 애신의 손엔 어울리지 않게 교통카드가 들려있었다.

 

 

“아씨, 너 왜... 도심 한복판에, 사냐.... 휴...”

 

“뭐야, 버스타고 왔어?”

 

“어. 할아버지한테 걸리면 죽거든. 들어가도 되지?”

 

 

 으응, 얼떨결에 길을 비켜준 동매가 대충 신발을 벗고 들어가는 애신의 뒤를 따랐다. 버스터미널에서 여기까진 꽤 거리가 있었을 텐데, 그 고생을 왜 굳이. 목 끝까지 차오른 질문을 동매는 굳이 뱉지 않았다. 집을 구경하는지 두리번거리던 애신이 방금까지 동매가 누워있던 쇼파에 털썩 앉았다. 뜨끈한 온기가 느껴졌다. 싫지만은 않은 온기에 애신이 쇼파를 슬며시 쓸어보다 가만히 서 있는 동매를 향해 갸웃거렸다. 집주인이 왜 그러고 서 있어, 민망하게. 애신의 말에 머쓱히 뒷머리를 긁적거리던 동매가 괜히 물었다.

 

 

“차라도 줄까?”

 

“차 좋아해?”

 

“..너 기다리는 동안 마시던 게 습관이 돼서.”

 

 

 아, 애신이 눈치를 보더니 어색하게 웃었다. 지물포 앞 찻집에서 만났었지, 마지막으로. 저를 향해 날아오르라 말하던 그 날의 동매가 떠올랐다. 지금의 동매는 그때의 동매와 비슷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운명인가보다, 전생은 다시 한 번 반복되려 하고 있었다. 어떤 결말을 내놓을지는 모르겠지만, 애신이 침을 꼴깍 삼켰다. 제 마음을 깨달은 순간, 당장 동매를 봐야겠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무작정 찾아왔기에 어떤 말로 제 진심을 꺼내야할지조차 생각해두지 않았다. 애신이 천천히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가만히 물이 끓는 것을 바라보니 애신과 함께했던 지난날들이 새삼 떠올랐다. 입학식 때의 기억, 수학 시간의 기억, 보건실에서의 기억. 애신은 제게 무슨 말을 하러 온 것일까. 생각이 자꾸만 제 욕심 쪽으로 기울었다. 그만하자, 동매가 생각을 지우려 고개를 털어냈다.

 금방 부엌으로 들어가 차를 내온 동매가 애신의 앞에 유리잔을 내려놓았다. 차를 마시는 애신을 가만히 바라보던 동매가 넌지시 물었다.

 

 

“..왜 왔어?”

 

 

 동매의 물음에 뼈가 있었지만 애신은 모른 척 시선을 피했다.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은 애신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는 동매를 향해 몸을 돌렸다. 두 시선이 서로를 향하고 있었다. 동매가 먼저 시선을 피했다.

 

 

“너 없으니까 허전하더라.”

 

 

 애신이 피식 웃었다. 3일 기다렸는데 이 정도면 6개월은 오죽했을까. 말을 마치며 등을 쇼파에 깊게 묻은 애신이 동매의 반응을 살폈다. 동매는 묵묵히 제 말을 듣기만 했다. 아무런 대답도 동요도 없는 동매가 야속했지만 애신은 애써 덤덤히 굴었다. 그동안 동매에게 세웠던 자존심 때문인지 제가 정작 하고 싶은 말은 꺼내지 못하고 빙빙 돌아갔다. 하려던 말은 이게 아닌데. 스스로도 자꾸만 제 마음을 에둘러 표현하는 자신이 답답했다.

 

 

“말 안 건다고 해놓고 사라지면 어떡해.”

 

 

 애신이 빤히 동매를 바라보았다. 동매는 손가락만 꼼질거리며 대답을 자꾸 망설였다. 동매로선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멀어지려고 드는 제게 애신은 계속해서 다가왔고 결국 지금에 이르렀다. 계속해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머리를 웅웅 울려댔다. 어쩌면 너도,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면서 반쯤 지워냈던 작은 소망이 계속 되살아났다. 이러면 안 되는데. 애신의 표정이 전생에서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참 많이 닮아있었다.

 

 

“네가 괴로워하는 모습, 슬퍼하는 모습. 그런 거 다 보고 싶지 않았는데.”

 

 그 날 네 표정이 나에 대한 동정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길래. 동매가 제 머릿속에 학교 옥상에서 애신과 마주했을 때를 그려냈다. 전생에 얽매여 제 감정을 주체 못하던 저를 안아오던 애신의 온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애신이 애써 제 속을 드러내지 않으려 침을 삼켜 넘겼다. 동매의 아팠던 마음이 절절히 느껴지고 있었다. 동매는 단 한 순간도 저를 잊은 적이 없었고, 단 한 순간도 저에 대한 죄책감을 떨쳐낸 적이 없었다. 많은 감정들이 속을 메웠지만 고마움과 미안함이 가장 컸다. 그렇지만 아직까지도 자책에 휩싸여 작은 고백조차 뱉지 못하는 네게서 가장 먼저 들어야할 것이 있었다. 그 한 마디는 우리의 관계를 단숨에 수평으로 끌어올리고 새로운 시작으로 이끌 것이다. 애신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왜 보기 싫은데?”

 

 

 애신은 하나의 대답을 향해 저를 유도하고 있었다. 결국 제가 직접 제 마음을 솔직하게 털어놓도록 만들었다. 입 밖으로 뱉는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간 참아왔는데. 동매가 애신의 표정을 살폈다. 애신은 가만히 저를 바라보며 제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너 좋아하니까.”

 

 

 참 웃기지, 아직까지도.. 동매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애신이 원하는 대답이 이거였겠지. 눈물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애써 참았지만 북받쳐 오르는 감정들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게 만들었다.

 

 

“근데 너도 알잖아.”

 

 

 그래서 그렇게 말했었잖아, 제물포역에서. 한 마디 한 마디를 간신히 뱉어내는 동매가 애신을 향해 겨우 고개를 들었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애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보지 못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니까 다행인 거겠지. 한 번 감정을 터트리니 쉼 없이 쏟아져 내렸다. 주체 못할 감정들을 꾹꾹 눌러 삼켜내다 마지막으로 뱉어낸 그 한 마디는 동매의 모든 감정을 축약해서 담고 있었다.

 

 

“미안해, 좋아해서..”

 

 

 동매는 결국 제 모든 것을 쏟아내었다. 전생에서부터 마음 속 깊이 숨겨둔 고백까지 모두 뱉어낸 동매는 힘없이 무너졌다. 애신은 그 모든 과정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동매에겐 혼자 안고 있던 감정들을 지워낼 시간이 필요했다. 전생에서부터 지금까지 안고 살아온 죄책감들을 다 저 눈물 안에 담고 떨궈내야 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달래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한참동안 들썩거리던 동매의 어깨가 천천히 가라앉자 조심스레 그의 앞에 앉은 애신이 동매의 시선에 맞춰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으로 애신을 향해 느릿하게 고개를 드는 동매의 볼에 눈물자국이 선명했다. 가만히 동매를 바라보던 애신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구동매. 평소보다 다정어린 목소리로 그를 부르는 애신에 동매가 눈을 동그랗게 떠보였다.

 

 

“그 사람, 죽었어. 나 지키다가.”

 

“...”

 

“너는 그러지 마.”

 

 

 동매의 두 볼을 붙잡고 확인하듯 응? 하고 되묻는 애신에 동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동매의 대답에 씩 웃은 애신이 그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토닥이는 박자에 맞춰 동매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어느새 동매는 애신의 어깨에 제 턱을 기댄 채 안겨 있었다. 부드럽게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과 천천히 말을 뱉는 애신의 목소리가 전부 위안이 되었다.

 

 

“다시는 나 때문에 다치지 말고, 울지도 말고...”

 

 

 약속할 수 있어?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애신에 피식 웃은 동매가 애신의 손가락을 접고 제 손바닥으로 그녀의 손을 그러쥐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작은 주먹에 힘이 실렸다. 못 하겠는데, 힘없이 말하는 동매에 애신이 괜히 그를 흘겼다. 해라 좀, 투덜거리는 애신을 향해 동매가 미소를 지었다. 이미 애신은 성큼성큼 다가와 제게 너무 큰 위로를 안겨주고 있었다. 제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해도 충분할 정도로. 애신이 몸을 일으키자 동매의 시선이 따라 올라갔다. 애신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덩달아 동매의 입꼬리도 쳐졌다. 왜 그러지, 갸웃거리는 동매를 향해 애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되겠네, 약속하면 사귀자고 하려 했는데.”

 그제야 작게 제 진심을 뱉은 애신에 동매가 애신을 따라 벌떡 일어났다. 애신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동매가 애신의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진짜로? 금세 눈을 반짝거리며 저를 바라보는 동매에 애신이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팔을 떼어내고 쇼파에 앉은 애신이 고갯짓으로 쇼파를 가리키자 동매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고분고분 쇼파에 다시 앉았다. 동매는 잔뜩 젖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검은 눈동자에 물기가 서리니 더욱 빛이 났다. 애신이 동매를 향해 턱을 괴고 씩 웃어보였다.

 

“내가 뭐하러 너한테 거짓말을 하겠냐.”

 

"...애기씨..."

“울지 말고, 너 우는 거 처음 본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저를 부르는 동매에 애신이 고개를 젓곤 다 식어버린 차를 홀짝 들이켰다. 동매가 그런 애신을 가만히 바라보다 어색하게 웃었다. 나 너 때문에 많이 울었는데. 저번에도, 이번에도. 제물포에서도, 애신의 머리카락을 베어 그녀가 제 목에 칼을 겨눴을 때도 눈물을 떨궜었는데. 애신의 꿈을 꾸는 날이면 꼭 베개를 적신 채로 눈을 떴었던 기억이 선명했다. 동매의 말에 놀란 애신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번에도?

“네가 자꾸 꿈에 나와서..”

 

“등신 진짜...”

 

 

 말이 심하네, 동매가 웅얼거렸다. 결국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린 애신에 동매가 아랫입술을 내민 채 애신을 바라보았다. 미안, 한참을 웃다가 제 눈가에 고인 눈물까지 닦아낸 애신이 생글생글 얼굴에 미소를 띄우곤 쇼파에 깊게 몸을 묻었다. 마음에 무겁게 놓였던 짐이 날아간 기분이었다. 앞으로의 삶은 그간 살아왔던 삶과는 조금 다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주 많이. 그와 함께 걷는 길이 어떤 장애물을 마주하고 어떤 형태로 다가올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제 옆에 서 있는 이가 구동매라면 아무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는 한평생 저만을 바라보았고, 저는 이제 그를 마주볼 준비가 되었으니까. 아직도 저를 못마땅하게 바라보고 있는 동매에 애신이 괜스레 농담을 던졌다.

 

 

“근데 나밖에 모르는 등신이니까 괜찮을 것 같다.”

 

“뭐야 그게.”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저번에도, 이번에도.”

 

 

 그러니까, 이번에는 같이 하자. 애신이 동매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한참동안 그 손을 바라보던 동매가 제 손을 내밀어 애신의 손을 맞잡았다. 서로의 온기가 전해지는 것을 천천히 느끼며 둘은 미소지었다. 일방에서 쌍방으로, 생을 관통해온 사랑은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맞이했다.

생을 관통한 나의 구원에게

;전생을 모두 기억하는 동매×동매에게 베어진 전생만을 기억하는 애신

 

 

 

 재미없다, 입학식 내내 동매의 머릿속은 한 가지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일본에 남아있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손에 억지로 이끌려 입학하게 된 고등학교였다. 이사장 이름도 마음에 안 들었다. 한성그룹 고사홍 회장이 이사장이라니, 구한말 염근리를 받으신 고사홍 어르신께서 환생하시기라도 하신 건지 얼굴도 비슷한 것이 왠지 저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시대에 환생한 것이 저 뿐만이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지만, 전생의 기억을 붙잡고 있기엔 현생을 살아가는 것이 급급했기에 금세 잊었었다. 그러나 동매의 육감은 언제나 들어맞았다. 현생에도, 전생에도.

 

 

“17기 학생 대표 영어과 고애신 학생이 학생 선서를 낭독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이고 발장난을 치던 동매가 너무도 익숙한 이름에 급히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오는 여학생은 단정한 중단발을 하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계단을 올라 선서문을 펼쳐서 천천히 낭독하는 그 목소리와 얼굴은 분명 그 여인이 맞았다. 제가 그토록 연모하던, 제 세상의 전부였던 한 여인. 고사홍 대감의 손녀, 고애신.

 

 

“애기씨..?”

 

 

 동매가 저도 모르게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소매로 슥 문질러 닦아냈지만 한 번 터진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오른손을 든 채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선서문을 읽어 내려가는 애신의 모습을 동매는 한 순간도 놓칠 수 없었다. 선서를 다 읽고 고개를 든 애신이 스쳐지나가듯 동매 쪽을 바라보았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그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제 또래들보다 유난히 큰 동매는 그 많은 신입생 가운데에 우뚝 솟아 있었고, 애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둘은 가만히 서로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동매는 더 이상 입학식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꾸준히 그려오던 미래였다. 혹시라도 애신과 동시대에 환생하게 된다면 이번엔 단지 그녀의 생에 한 순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생을 같이 걷는 동반자가 되고 싶다는 작은 소망. 하늘이 하루의 시간을 더 준 덕에 마지막으로 애신을 볼 수 있었던 것처럼 이번 생에도 저를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17년 동안 단 한 번도 애신의 이름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기에, 동매는 다음 생을 기약하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하늘이 정말 제 편이라도 되는 양 애신을 마주치게 해주니, 동매의 속에선 물이 끓듯 계속해서 주체 못할 기쁨 같은 것들이 끓어오르고 머릿속에선 전생에 하지 못했던 온갖 말들이 떠올랐다.

 

 입학식이 끝나고 동매는 급히 애신을 찾았다. 출구 쪽으로 밀려드는 아이들을 피해 반짝반짝 빛이 나는 저의 애기씨를 찾아내려 애썼다. 그리고 애신을 찾아내 팔목을 붙잡았을 때,

 

 

“애기ㅆ... 아니, 고애신! 잠깐만..!”

 

“나 너랑 할 말 없는데.”

 

 

 애신은 마치 동매가 애신의 머리카락을 베어낸 날처럼 굳은 채 동매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동매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한 채 멈춰서선 애매한 거리를 유지했다. 애신은 그대로였다. 그 차가운 눈빛도, 단호한 말투도. 그에 반해 저는 너무 많이 변해있었다. 수염도 안 나고, 머리도 짧게 자르고. 애신이 당연히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애신은 마치 전생의 구동매를 안다는 듯 굴었다.

 

 

“애기씨라 부르는 거 보니 너도 전생을 기억하나본데..”

 

“어?”

 

“머리카락을 잘라놓고 뻔뻔하게 날 붙잡아? 내 눈에 띄면 죽여 버린댔지.”

 

 

 뭐? 동매가 애신의 팔을 놓았다. 애신의 말에 절로 손의 힘이 풀렸다. 애신이 전생을 기억하고 있다. 그렇지만 분명 그 뒤에 많은 일들이 있었는데. 애신은 그 이후에 유도장에 저를 찾아왔었고, 동경에서 그녀를 구하다 다친 제 팔을 보자기로 묶어주며 고맙다 말했었는데. 그리고 3년 뒤, 조선에 돌아와 애기씨에게 날아오르라 말하던 기억이 생생한데. 애신은 마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저를 적대했다. 수많은 질문들이 떠올랐지만 애신의 눈빛은 동매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애신을 바라보는 동매에게 애신은 계속해서 쏘아붙였다.

 

 

“한 번만 더 눈에 띄면 진짜 죽어.”

 

“자, 잠깐만! 그 뒤의 일들은 기억 안 나..?”

 

 

 하, 수작부리지 마.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는 모습마저 그대로다. 강당을 나가려는 애신을 동매가 다시 붙잡았다. 처음보다는 손아귀에 힘이 많이 빠져있었다. 무엇부터 물어야 제 속에 가득 찬 의문을 해소해낼 수 있을까, 동매가 아랫입술을 꾹 물곤 천천히 기억을 돌이켰다. 그녀의 손길을 애써 피하려던 저의 팔을 꽉 붙들고 상처를 확인한 뒤 보자기로 제 상처 부위를 꽉 묶어 지혈해주던 애신의 모습, 밤새 문 앞을 지키고 다음 날 조선으로 돌아가는 애신을 지켜보던 저. 이렇게 생생한 걸 보면 환상은 아닌데 어째서 애신은 기억을 못하는 것인지 답답함이 차올랐다.

 

 

“너 일본 갔을 때 희성 나으리 집에서.. 아 하여튼 기억 안 나냐고.”

 

 

 차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말하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붉어질 제 얼굴에 애신은 다시 경멸하듯 저를 째려보았을 것이다. 간절하게 물어오는 동매를 무시한 애신이 그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미친 새끼, 졸지에 욕을 들어먹은 동매는 더 이상 애신을 잡지 못하고 유유히 강당을 떠나는 그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애기씨를 만난 건 좋은데, 저를 적대하는 애신의 모습과 동시에 깨어져버린 제가 그리던 행복한 미래는 동매를 우울감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애기씨, 동매는 언제나 그랬듯 그저 가만히 그녀를 작게 중얼거리며 강당에 남아있었다.

 

 

 

*

 

 

 

 동매는 말을 막 배울 때부터 전생의 기억을 모조리 가지고 있었다. 어느 날 하룻밤 동안 모든 전생의 기억이 동매에게로 돌아왔다. 그 후 백정이었을 적 사람들에게 매질을 당하던 순간의 고통과 감정까지 밀려드는 덕에 매일 밤 악몽을 꾸며 베개를 잔뜩 적실 정도로 괴로웠지만 그만큼 남들보다 배움이 빨랐다. 다른 아이들보다 성숙하고 뭐든 빨리 익히는 동매를 보고 가족들은 천재가 났다며 좋아했지만 동매는 그들이 우스웠다. 천재는 무슨, 제 전생을 모조리 기억하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구한말, 혼란의 시대. 저는 무신회 한성지부장 구동매였다.

 

 동매의 집안은 유명 대부업체를 운영했다. 꽤 규모가 있는 회사의 크기를 실감할 때마다 동매는 저와 지독하게 얽힌 운명이라 생각했다. 가르치지도 않은 일본어를 유창하게 말하는 동매를 보고 동매의 부모님은 그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기로 결정했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동매는 바로 일본으로 보내졌다. 초반엔 얌전히 있었지만 가슴 속 깊이 담겨있는 적개심은 동매를 다른 아이들과 싸우게 만들었고 결국 중학교를 졸업한 동매는 급히 한국으로 소환됐다. 동매에게 적합한 고등학교를 찾던 그의 부모님이 한성고등학교를 선택하자 동매는 이사장이 마음에 안 든다며 거부했지만 울며 겨자 먹기로 학교를 지원하게 되었다. 한성고등학교는 외국인 유학생이나 교포, 외국에서 오래 지낸 한국인을 대상으로 한 사립학교였기에 반이 외국어 별로 나뉘어 있었고, 일본 유학을 다녀온 동매는 자연스레 일본어과를 택했다. 일본어과 교실 구석자리에 앉아있던 동매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젖었다.

 

 

‘애기씨가 영어과랬지..’

 

 

 얼굴도 목소리도 모든 것이 그대로였는데, 영어과라는 걸 보니 미리견말에 이제 능숙해지셨나봅니다, 수업시간에도 동매의 머릿속은 온통 애신이었다. 저를 노려보던 애신의 눈빛이 마음을 쿡쿡 찔러댔다. 반도 달라서 자주 못 볼 텐데, 애신에게 오해 아닌 오해를 어떻게 풀어야할지 고민이었다. 무얼 기억하고 무얼 기억하지 못하는 지가 중요했다. 단지 악감정만 남은 거라면 곤란한데, 저를 무겁게 짓누르는 잔인한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동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책상 위에 엎드렸다. 당장 애신에게 말을 거는 것부터가 문제였다.

 

 수학 시간, 입학식 전 미리 쳐둔 분반고사는 동매를 영어과 교실로 이끌었다. 발걸음조차 들이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영어과 교실에 첫 발을 내딛는 순간, 동매는 첫 줄에 앉아 있는 애신을 마주쳤다. 옆에 앉지 말라는 듯 적개심으로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는 애신에 동매는 말조차 걸지 못한 채 애신이 잘 보이는 다른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나와서 자리 뽑고 그대로 앉으면 된다. 1학기 내내 그렇게 앉을 거니 알아두고.”

 

 

 하늘이 정말 나를 돕는 구나, 자리를 뽑은 순간 동매는 저도 모르게 큰 소리로 쾌재를 불렀다.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것을 눈치 챈 동매가 눈치를 보며 입을 꾹 다물곤 천천히 제가 뽑은 자리로 가서 앉았다. 옆 자리에서 불타오르는 눈빛이 느껴졌다. 애신이었다. 동매가 애써 입꼬리를 내려가며 목을 가다듬었지만 곧 귀에 걸릴 듯 계속해서 올라가는 입꼬리는 동매의 기분을 여과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애신이 제게서 시선을 떼자마자 턱을 괴고 애신을 향해 고개를 돌린 동매가 씩 웃었다.

 

 

“이제 죽일 거야? 한국은 총기소지 불법인데, 어디서 튀어나오려나.”

 

“... 너 많이 변했다.”

 

“그러는 애기씨는 그대로십니다.”

 

 

 태연하게 전생의 자신 마냥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동매에 애신이 동매를 홱 쏘아보았다. 앞으로 말 걸지 마, 저를 빤히 바라보는 동매를 향해 무뚝뚝히 말한 애신은 고개를 다시 돌려 교과서와 칠판만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지 뭐, 씩 웃은 동매가 느긋하게 교과서를 펼쳤다. 애신의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행복했다. 나란히 앉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이리 성취합니다.

 

 

 행복에 젖어있는 동매의 바로 옆에 앉아있는 애신은 치밀어 오르는 화를 주체하려 애썼지만, 손에 계속 힘이 들어가는지 종이에 닿자마자 뚝뚝 부러지는 샤프심은 그러지 못하는 애신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그가 같은 시대에 환생했을 줄 상상도 못했다. 애신은 강당에서 동매를 마주했을 때 마치 동매가 수미의 머리채를 잡았을 때처럼 뺨이라도 때려주고 싶었지만 보는 눈이 많아 차마 그러지 못했던 걸 계속해서 아쉬워했다. 애신은 제 전생을 꿈을 통해 기억하게 되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애신은 전생에 대한 꿈을 꿨다. 동매가 나오는 모든 순간은 악몽이었다. 진고개에서 잔인하게 사람을 베는 것부터 제물포에서 제 다리에 총을 쏘고 제 머리카락을 베어낸 것까지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이 되살아났다. 감각까지 기억나지는 않았지만 증오라는 감정은 그득히 묻어나왔다. 그래서 입학식 날 그를 당연히 밀어내었는데, 동매는 알 수 없는 말을 해댔다. 그가 말하는 ‘그 뒤’라는 게 뭘까? 의문이 일었지만 애신은 괜한 자존심에 먼저 밀어낸 동매에게 선뜻 말을 걸 수 없었다. 복잡한 감정들이 계속해서 샤프심을 부러트렸다.

 

 애신의 말대로 수업이 끝나고 그의 반으로 돌아갈 때까지 동매는 단 한 번도 말을 걸지 않았다. 계속 말 걸 줄 알았는데 안 거네. 동매가 떠난 자리를 가만히 바라보던 애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동매에 대한 생각을 지우려 애썼다.

 

 

 점심시간이 되어 같은 반 친구들과 점심을 먹고 오니 애신의 책상 위에 막대사탕 한 개가 놓여있었다. 딸기맛 츄파춥스 위에 어울리지 않게 큰 크기의 포스트잇이 붙어있었다. 뭐냐고 가득 기대를 담아 물어보는 제 친구들을 향해 아무 것도 아니라며 웃어 보인 애신은 포스트잇을 떼어내 천천히 한 글자 한 글자를 눈에 담다가 제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하, 헛웃음을 짓는 애신에 분위기가 좋지만은 않음을 느낀 친구들이 애신의 눈치를 살피다 흩어졌다.

 

 

‘눈에 띄지 말고 말도 걸지 말라시니 이리 두고 갑니다 애기씨’

 

 

 천천히 사탕의 포장을 벗겨서 입에 쏙 집어넣은 애신이 입 속에서 달디단 사탕을 굴렸다. 내가 딸기맛 좋아하는 건 어떻게 안 거야, 지독한 놈. 많이 변했던데, 말투도 분위기도. 입 안에서 단단했던 사탕이 다 녹아 없어질 동안 애신은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동매를 생각했다. 전생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 계속해서 그에 대한 의문을 머릿속에 만들어냈다.

 

 

 

*

 

 

 

“저기, 구동매.”

 

 

 뭐야, 동매가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귀를 의심했다. 또 다른 누군가가 같은 시대에 환생하기라도 했는지 그 익숙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불러내었을 때 동매는 혼란스러운 감정을 얼굴에 그대로 드러내며 고개를 들었다. 잔뜩 인상을 쓴 동매에 주춤한 상대는 곧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우리 주번이야. 너 1번 나 2번. 이것도 인연인데 잘 지내보자.”

 

 

 김희성, 동매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어안이 벙벙했다. 고사홍, 고애신에 이어 김희성까지.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도 동시간대에 환생했을 수 있다는 건가, 가만히 저를 바라보는 동매에 희성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입만 뻐끔뻐끔 거리던 동매가 힘겹게 말을 꺼냈다.

 

 

“너... 나 몰라? 아니 그보다 너 일어과야?”

“같은 반인데 왜 몰라. 아 맞다, 나 일본에서 10년 살다왔는데 너도 살다왔다며? 어디서 있었어?”

 

 

 아무래도 우린 친구가 될 운명이었나 보다, 눈꼬리가 휘게 웃으며 손을 내미는 희성에 동매는 내밀어진 희성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다 턱 잡고 흔들었다. 동무 아니오. 맞다, 동매랬지. 나 김희성이오. 그를 밀어내는 저에게 계속해서 다가와 결국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만든 희성은 그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손을 내밀어왔다. 전생을 기억하지는 못하는 듯 보였다. 애기씨도 알고 계셨을까, 나름 애기씨의 정혼자 나으리였는데.

 정혼자, 그 단어를 생각하니 동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번엔 그 누구한테도 새치기 당하지 않을 것이다. 비록 애신이 제게 쌀쌀맞게 굴고 있지만, 꼭 오해를 풀고 애신의 마음을 먼저 쟁취할 것이다. 야야, 아파! 희성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손을 빼곤 제 손을 털었다. 미안, 저도 모르는 새 솟아오른 질투에 동매가 급히 사과했다.

 

 

 

*

 

 

 

“...희성 나으리, 우리 반이던데.”

 

“알아. 우리 친해.”

 

“친...! 아니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말 걸지 말랬지, 작게 으르렁거리는 애신에 결국 동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친해? 하, 무럭무럭 샘솟는 질투가 자꾸만 머릿속을 메웠다. 문제를 풀어야하는데 간단한 수학 공식조차 기억나질 않았다. 슥 애신의 교과서를 보니 애신은 술술 문제를 풀어나가고 있었다. 나만 힘들지, 입술을 삐죽 내민 동매가 칠판의 필기를 베껴나갔다. 문제를 풀던 애신이 제게서 떨어져 나간 시선에 힐끗 동매 쪽을 바라보았다. 그걸 놓칠세라 책에 눈을 고정한 동매가 말을 붙였다.

 

 

“너 근데 진짜 하나도 기억 안 나?”

 

“내가 뭘 더 기억해야 해? 나 아직도 허벅지 따끔거리거든?”

 

 

 헉, 크게 숨을 들이킨 동매가 책상 위로 힘없이 엎어졌다. 미안해, 늦은 사과에 애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왜 기억 못하지, 나한텐 너무 소중한 기억들인데. 하늘도 무심하시지. 도와줄 거면 제대로 도와주던가. 중얼거리는 동매에 결국 애신이 샤프를 소리 나게 내려놓곤 동매를 향해 고개를 홱 돌렸다. 동매가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천천히 애신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잔뜩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애신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구동매.. 화를 참는 듯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동매가 꿀꺽 침을 삼켰다.

 

 

“말을 해줘야 알지, 내가 뭘 더 기억해야 하냐고!”

 

“구동매 고애신 뒤로 나가. 왜 그렇게 쑥덕거려? 너네 벌써 연애하냐?”

 

“아니거든요!”

 

 동매에게 소리를 지르다 저를 뒤로 내보내는 수학 선생님에게까지 빽 소리를 지른 애신이 곧 이어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얼굴을 훅 붉혔다. 애신과 동매가 책과 필기구를 주섬주섬 챙겨 교실 뒤쪽으로 걸어 나갔다. 추욱 쳐진 애신의 어깨와 달리 동매는 뭐가 신났는지 입꼬리가 올라가고 있었다. 연애하는 것처럼 보였나봐, 아무런 의미 없이 던진 선생님의 말 하나에도 동매는 혼자 행복해했다. 동매는 부정 안 하는데, 그런 동매의 모습을 보았는지 한 아이가 던진 말에 모두가 동조하며 둘의 사이에 대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애신이 동매를 홱 째려보았다. 빨리 아니라고 해라잉.. 이를 악물고 낮게 속삭이는 애신에 결국 동매가 개미만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아니에요... 그 뒤로 말도 시선도 주지 않는 애신에 동매는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바로 옆에 있는 애신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참아내느라 애를 먹었다.

 

 

 

*

 

 

 

 동매는 수학 수업을 제외한 수업시간에 애신을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 모처럼 들떠있었다. 아침부터 희성이 전해준 희소식은 동매를 하루 종일 구름 위로 둥둥 떠다니게 만들었다. 오늘 체육 시간에 영어과도 체육 한다더라, 그 한 마디에 체육 수업 전까지 싱글벙글 웃고 있는 동매를 희성이 딱하게 바라보았다. 어차피 다른 선생님이 오셔서 수업도 따로 하는데 뭐가 저리 좋을까, 희성의 걱정에도 아랑곳 않은 동매가 계속해서 시계를 바라보았다.

 

 수업 시간이 되어 운동장으로 나오니 저 멀리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애신이 보였다. 못 하는 거 하나 없으신 우리 애기씨, 피구도 잘 할 텐데. 공을 들고 애신만 바라보는 동매에 연습 상대인 희성이 결국 짜증을 내며 동매에게 소리쳤다. 야 구동매, 패스 안 해? 그제야 희성이 있다는 게 생각난 동매가 어물쩍거리며 대충 공을 넘겼다. 저 멀리 애기씨가 있는데 정작 마주보고 있는 게 이 나으리라니, 뭔가 억울했지만 동매는 애신과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다고 다짐했다. 희성의 공을 받으려 잠시 애신에게서 눈을 뗀 순간, 공을 받음과 동시에 멀리서 여학생들이 애신의 이름을 다급히 외치는 게 들려왔다.

 

 

“애신아!”

 

 

 동매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애신이 넘어져 있었다. 잘 보이진 않았지만 꽤 크게 넘어진 건지 몸을 일으키질 못하고 있었다. 애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희성에게 공을 거칠게 넘긴 동매가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야, 구동매! 희성의 부름에도 아랑곳 않은 채 한 달음에 애신에게로 달려간 동매가 애신의 주변을 살폈다. 애신의 까진 무릎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하아, 하아. 가쁜 숨을 뱉어내던 동매의 눈이 차게 식었다. 천천히 애신에게로 다가가 등을 돌리고 꿇어앉은 동매가 낮은 목소리로 오직 한 단어를 뱉었다.

 

 

“업혀.”

 

“수업이나 들으러 가. 혼자 갈 수 있어.”

 

“잔말 말고 업혀, 고애신.”

 

 

 그를 밀어내는 저를 돌아보지 않은 채 낮게 으르렁거리듯 말하는 동매에 애신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등에 제 몸을 맡겼다. 가볍게 애신을 업은 동매가 천천히 보건실로 걸음을 옮겼다. 몰려들었던 영어과 아이들은 수업을 위해 흩어졌고, 희성은 그런 둘을 지켜보고 있었다. 망했다, 천천히 제 쪽으로 다가오는 체육 선생님의 모습에 희성이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

 

 

 

 보건실엔 아무도 없었다. 선생님께선 잠시 화장실에 가신 것인지 부재중이라는 팻말도 걸려있지 않았다. 개수대 앞에 애신을 내려준 동매가 천천히 물로 애신의 상처부위를 씻겨냈다. 애신은 상처가 난 다리를 땅에 제대로 디디지도 못하고 있었다. 둘은 서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동매가 일어나 약품을 찾으러 가자 절뚝거리며 의자에 앉은 애신이 제물포역에서 동매를 마주했던 날을 돌이켰다. 방금 운동장에서 본 동매의 표정은 마치 저를 막아서던 그 날 같아서 애신은 동매의 등에 업힐 수밖에 없었다. 저를 쏜 그 자의 눈에 가득 담겨있던 것은 자책이었으니까.

 

 동매가 애신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소독약을 바른 솜으로 상처를 천천히 닦아냈다. 애신의 입술 새를 비집고 신음이 새어 나왔다. 조금만 참아, 묵묵히 상처를 닦아내고 연고를 바른 뒤 큼지막한 반창고를 붙여주는 동매의 손길은 그 어느 때보다 섬세했다. 처치를 마친 동매가 서서히 일어났다. 애신이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일어나는 동매와 눈을 맞췄다. 한참동안 아무 말 없이 애신을 바라보던 동매가 급히 눈을 피했다.

 

 

“...나 갈게.”

 

“가지 마. 여기 있어.”

 

 

 보건실을 나가려던 동매를 애신이 멈춰 세웠다. 두 번째다, 애신이 저를 다시 붙잡았다. 동매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애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의 그 한 마디가 자꾸만 떠올라서 동매의 심장이 쿵쿵 뛰며 동매의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저번과 다르게 동매는 그녀에게로 돌아가는 길을 택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동매가 애신에게로 돌아왔다. 애신은 그저 아무런 표정 변화 없이 동매를 올려다보더니 제 옆에 있던 의자로 눈을 옮겼다. 동매는 자연스레 애신의 시선이 머무른 의자에 앉았다. 참으려고 했는데 참아지지 않은 눈물들이 자꾸만 떨어졌다. 죄책감과 저를 붙잡았던 애신에 대한 사랑이 한데 섞여 이미 문드러진 마음을 자꾸만 쥐어짠다. 고개를 푹 숙이고 말없이 눈물을 떨구는 동매에 애신이 당황했는지 급히 말을 붙였다.

 

 

“너 울어..?”

 

“....”

 

“이게 뭐 별 거라고, 나 괜찮아. 너도 어디 다쳤어?”

 

“...아프다며.”

 

 

 뭐? 되묻는 애신에 동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직도 따끔거린다며, 허벅지. 애신이 동그랗게 뜨고 동매를 바라보았다. 동매를 제게서 밀어내려 했던 작은 거짓말까지 동매는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었다. 애신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할지 고민하다 그저 어설프게 웃었다. 하하하... 웃는 애신에 동매가 따라 웃더니 제 눈물을 소매로 훔쳤다. 다시 흐르는 정적과 어색해진 공기가 둘 뿐인 보건실을 메웠다. 애신이 손가락을 꼼질거리다가 그를 불렀다.

 

 

“...구동매.”

 

 

 너는 내가 왜 좋아? 애신의 질문에 동매가 고개를 들었다. 천천히 애신의 얼굴을 살피던 동매가 생각에 잠겼다. 사람 목숨은 다 귀하다 했다,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아주 오랜 옛날 어린 애신이 어린 제게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단지 백정이란 이유로 맞아죽던 시대에 그녀는 저를 처음 사람으로 대해준 이였고, 제 목숨을 구해준 이였고, 세상물정 모르는 말로 제 열등감에 불을 지핀 이였다. 동매는 제 울분을 담아 고르고 고른 한 마디로 애신이 내민 손길을 베어냈다. 그러나 가마에서 내린 그 순간 알 수 있었다. 제가 애신을 베어낸 것은 순간 가슴 속 깊숙이 스며든 애신을 몰아내기 위해서였다는 걸, 그리고 그것은 처참히 실패했다는 걸. 애신의 가마에 올라탄 순간부터 이미 동매는 애신으로 물들어 있었다. 제가 갖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저를 구해준 이에 대한 고마움, 그런 마음들이 한데 모여 사랑이란 감정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동매는 그 것을 제 평생 동안 소중히 간직했다. 지난 과거를 돌이키던 동매가 실없이 웃었다. 참, 고애신 하나만 바라보며 살았던 인생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저에게 있어 애신은 야소교인들이 열렬히 숭배하던 하늘님보다도 더 고귀한, 하나의 종교였으니까. 천천히 애신을 돌아본 동매가 미소 지었다.

 

 

“네가 날 가마에 태운 순간부터,

너는 나의 구원이었어.

 

 

 그래, 너는 나의 구원이었다. 그 말 한 마디면 제가 가진 감정들 모두를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동매가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네가 내 세상의 전부였고, 널 구하기 위해서라면 그 모두가 적이 되어도 상관없었어, 나는.

 

 그래서 네 머리카락을 잘랐어. 현재 애신의 머리카락은 동매가 머리를 자르던 때와 제법 길이가 비슷했다. 그 새카만 머리칼을 볼 때마다 묵직하게 올라오는 죄책감을 지우려 더욱 애신에게 다가갔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밀어내는 애신에게 상처받지 않는 척. 지난 생에서 계속 애신을 베어내던 제게 돌아오는 인과응보겠거니, 하며.

그래서 그랬어, 덤덤히 말하는 동매의 눈빛이 애처로웠다. 젖어든 동매의 눈에 한가득 애신이 담겼다. 애신은 혼란스러운 듯 얼굴 가득 근심이 어려 있었다. 아려오는 가슴에 동매가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전생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그 동안 애신은 계속해서 돌이켜보았지만 동매와 함께 있었을 때 좋았던 기억이 단 한 장면도 떠오르지 않았다. 동매를 떠올리면 증오, 경멸, 분노 같은 부정적인 감정만 전해져왔다. 그런데 지금은 왜 애증이 느껴지는 것 같지. 그 사이에 숨겨져 있었던 작은 사랑이란 마음이 이제야 느껴졌다. 제 기억만을 두고 돌이켜본다면 절대 가질 수 없었던 그 감정은 현생에서 생겨난 것이 아닌, 생을 관통하듯 이어져 온 감정이었다. 머리에 묵직한 통증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 때, 보건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깜짝 놀란 둘이 동시에 문을 바라보았다. 너네 뭐하니? 급하게 들어오는 보건 선생님에 일어난 동매가 덤덤히 상황을 설명했다.

 

 

“애신이가 다쳐서.. 제가 급한 대로 처치했는데, 괜찮죠?”

 

“괜찮기는, 내가 다시 볼 테니까 넌 빨리 수업 들어가.”

 

 

 네, 애신을 잠시 돌아본 동매가 이내 보건실을 나섰다. 애신은 눈으로 동매가 나간 자리를 가만히 쫓았다. 동매가 처치한 상처 부위를 면밀히 살피던 선생님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되게 잘 처치했네, 많이 다쳤으면 비서님께 연락드릴까? 물어오는 선생님에 웃으며 괜찮다고 답한 애신이 동매가 앉아 있던 제 옆 자리를 손으로 쓸어보았다. 금세 온기가 식은 자리가 허전했다.

 

 보건실 문 밖을 나서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동매가 급하게 벽을 짚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너무 깊었나보다, 애신의 근심 어린 표정을 보니 더욱 가슴이 아렸다. 이제 그만해야겠다, 작게 꿈꿔왔던 소망을 지켜나가는 게 이렇게까지 힘들 줄 몰랐다. 애초에 저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만 가지고 있는 애신과 함께 사랑 같은 걸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저의 잘못이었다. 현재의 애신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것은 경멸, 혹은 동정.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생을 관통해온 저의 외사랑을 이젠 놓아줄 때였다.

 

 

 

*

 

 

 

 그 뒤 동매는 더 이상 애신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수학 시간에도, 복도를 지나가다 마주칠 때도. 그렇지만 점심시간마다 책상 위에 놓여진 딸기맛 츄파춥스는 여전했다. 동매가 매 점심시간마다 애신이 없는지 확인하고 영어과 교실에 들어와 책상 위에 놓고나가니, 아이들은 계속해서 애신에게 동매와 어떤 관계인지 물었다. 아무런 사이 아니라며 넘어가던 애신도 슬슬 화가 나기 시작했다. 말도 안 걸면서 사탕은 왜 가져다 놓는 거야. 사탕을 볼 때마다 울컥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보건실에서 알 수 없는 통증을 느낀 뒤로 애신은 거듭 드는 동매 생각에 밤잠을 쉬이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동매는 자꾸만 제게 훅 다가왔다 훅 멀어졌다. 결국 애신은 아이들 앞에서 동매가 준 사탕을 보란 듯이 버렸다.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지만, 혼란스러운 저를 위한 행동이기도 했다.

 

 

“진짜 지독한 놈...”

 

 

애신의 단호한 대응에 아이들은 결국 아무 사이도 아닌가보다고 결론을 짓고 떠나갔지만, 애신은 수업 내내 죄책감에 끙끙 앓았다. 꼭 버려야만 했던 걸까, 다른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계속해서 생각나는 울던 동매의 얼굴이 자꾸만 제 가슴을 콕콕 찔렀다. 이게 다 그 마음 때문이다, 그 숨겨져 있던 정체 모를 작은 감정이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바람에 헷갈려서 이러는 것이다, 라며 스스로를 자극했지만 아른거리는 동매의 얼굴은 그것이 고작 작은 마음이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국 애신은 방과 후 아이들이 모두 떠난 교실에 홀로 남아 사탕을 버린 쓰레기통을 뒤적거려야 했다. 조심스럽게 사탕 껍질을 씻어낸 애신은 그것을 제 기숙사 서랍 안에 소중히 넣어두었다.

 

 

“구동매, 네가 준 사탕 고애신이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소문났던데.”

 

 

 그러게 내가 뭐랬냐, 그런 거 하지 말랬지. 동매의 앞자리에 앉아 그를 타박하는 희성의 말을 동매는 아무 말 없이 듣고만 있었다. 애기씨는 정말 나를 싫어하시나보다, 외사랑을 포기하려 했지만 그 오랜 감정은 쉽게 떨쳐지지 않았다. 말을 걸지 않으면 입이 근질거렸고, 애신의 뒷모습만 보면 잡고 싶었다. 지금 상황에서 제가 할 수 있는 건 사탕을 가져다주는 것뿐이었는데. 앞에서 희성이 무어라 떠들던 상관없었다. 이미 첫 문장에서부터 동매는 넋이 나가버렸다. 동매의 표정이 꽤나 살벌했는지 희성이 계속 말을 이어가다가 뚝, 멈추곤 동매를 살폈다.

 

 

“너... 지금 누구 하나 죽일 것 같은 표정인데 난 아니지?”

 

“가로로 갈라줄까, 세로로 갈라줄까.”

 

“하하 농담도... 농담 맞겠지?”

 

 

 전생과 겹쳐지는 희성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은 동매가 괜히 농담을 던졌다. 많이 우울했다. 전생에 나였음 누구 하나 잡고 두들겨 패거나 대련으로 애들을 좀 괴롭혔겠지. 지금의 저로서는 속에 감정을 하나하나 담아두는 수밖에 없었다. 책상 위로 엎드린 동매가 푸욱 한숨을 뱉었다. 버렸단다, 사탕을. 성의가 베어진 순간 찾아온 절망이 제 마음을 더욱 짓눌렀다. 애기씨도 이런 기분이셨을까. 애신이 받았던 상처가 그대로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지난날의 과오가 그대로 돌아오는 것이 새삼스럽게 아팠다.

 

 그 다음 날, 동매는 사탕 대신 초콜릿을 가져다 놓았다. 애신은 미칠 지경이었다. 사탕이 버려졌다는 얘기를 들은 건지 기막힌 발상을 한 동매에 애신은 혀를 내둘렀다. 버렸다는 얘길 듣고도 왜 자꾸 가져다 놓는 거야. 치솟는 감정들에 눈가가 화끈거렸다. 점심시간 후 졸음이 몰려드는 5교시에 동매가 준 사탕을 먹으면 잠이 달아나고 가슴이 콩닥콩닥 뛰는 걸 단순한 슈가러쉬라 치부했었던 제가 어리석었다. 자꾸만 보건실에서 울던 동매가 제 머리카락을 자르던 그 날의 동매와 겹쳐졌고, 그럴 때마다 괴리감이 애신을 괴롭혔다. 수년간 오직 증오의 대상이었던 동매는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제 마음에 큰 파동을 일으키고 있었다.

 영어과 아이들 사이에선 이미 동매가 애신을 짝사랑하는 것이 다 알려져 있었고, 결국 보다 못한 아이들이 애신에게 동매의 정성을 좀 이해해주라는 말을 했을 때 애신은 책상을 박차고 일어나게 되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작은 초콜릿들을 손에 가득 담아 주머니에 구겨 넣은 애신이 일어과 교실로 향했다. 동매의 얼굴을 봐야겠다. 제 앞에선 한 마디도 꺼내지 않으면서 자꾸만 군것질 거리를 가져다 놔 저를 혼란스럽게 하는 그의 의중을 알아내야겠다.

 

 책을 읽던 동매가 누군가 제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곤 몸을 일으켰다. 소리의 근원은 뒷문이었다. 그리고 애신이 그 곳에 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꽤 얼굴을 구긴 채로.

 

 

“나와, 구동매.”

 

 

 으아악, 너 진짜 어쩌려고 그랬어! 애신이 부른 건 동매인데 더 난리가 난 것은 희성이었다. 애신의 구겨진 표정만큼 동매의 낯빛은 어두워져갔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복도에서 마주한 둘은 제물포역에서의 만났을 때 마냥 서로를 날 선 눈빛으로 응시하고 있었다. 먼저 풀이 꺾인 것은 동매였다. 고개를 숙여 시선을 피했다 다시 애신을 마주 보니 애신의 눈에 힘이 조금 풀려 있었다. 애신이 제 손을 펼쳐 동매가 제 책상에 올려다 놓은 초콜릿을 보여주었다. 녹았는지 흐트러진 모양에 동매의 시선이 흔들렸다.

 

 

“왜 자꾸 뭘 가져다 놓는 거야. 사탕도 그렇고 초콜릿도 그렇고.”

 

“너 그거 좋아했잖아, 딸기맛.”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애신의 눈초리에 동매가 힘없이 웃었다. 어떻게 알기는. 제 집 2층에서는 진고개 거리가 훤히 보였고 그 길에 애신이 지나가기라도 하면 눈에 불을 켜고 그녀를 눈으로 좇았다. 단 한 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탕을 한 입에 쏙 집어넣고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는 모습, 그리고 저를 발견한 후 굳어버린 얼굴. 눈을 감으면 그 모든 기억이 선명히 제게 몰려들었다.

 

 

“맨날 사먹었는데, 제빵소에서... 네가 먹던 그 딸기맛 사탕 맛있더라.”

 

 

 애신의 표정이 단박에 일그러졌다. 그 날의 기억이 천천히 제게로 다가왔다. 서슬 퍼런 칼날에 무참히 베어지던 왜인들, 그들의 피로 얼룩진 동매의 얼굴, 서서히 제게 고개를 돌리고 저를 빤히 바라보는 서늘한 눈빛. 사탕의 단맛이 잊힐 정도로 코끝을 강하게 찌른 혈향. 애신이 주먹을 꽉 말아 쥐자 손에 들려있던 초콜릿이 뭉개졌다. 애신의 손에 시선을 두고 있던 동매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네 덕에 생각났다, 그 피비린내 나던 날. 진고개에서 다시 만난 날.”

 

 

 착각이 분명했다. 그 작은 마음이 이제는 더 이상 다른 마음들을 동요시켜 저를 흔들어놓지 않았다. 제 앞의 동매는 제물포에서의 날처럼 눈에 가득 자책을 담은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앞으로 이런 거 가져다 놓지 마, 말 걸지도 말고.”

 

 

 유유히 떠나는 애신을 동매는 잡지 않았다. 잡고 싶다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다. 애신은 완전히 저를 밀어냈다. 모든 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동매가 큰 손으로 제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무언가 깨어지는 기분이었다. 이젠 정말 그녀를 제 마음 속에서 놓아줄 시기가 된 듯 싶었다. 애신이 간 걸 보고 뛰쳐나온 희성이 동매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동매의 표정은 세상의 빛을 모조리 잃어버린 사람 마냥 그 어느 때보다도 어두웠다.

 

 

 

*

 

 

 

 모처럼 매점을 들린 애신은 음료수를 계산대 위에 올려놓고 나서야 지갑을 두고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남은 쉬는 시간들은 이동수업이라 매점에 오기 힘들고, 지갑을 다시 가지러 가기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있었다. 아이씨.. 민망함에 입술을 꽉 깨물고 돈을 빌릴 만한 사람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린 애신은 그마저도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아는 사람이라곤 동매뿐이었다. 사실 우뚝 솟아 있는 동매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그에게 돈을 빌리고 싶지는 않았다. 서로 대화를 하지 않은 지 한 달은 되어가는 것 같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리니 딱 900원이 있었지만 매점에서 파는 것들은 적어도 1000원 이상이었다. 애신이 제 손의 동전들을 꽉 말아쥐곤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한 번만 깎아주시면 안될까요.. 제가 지금 900원 밖에 없는데..”

 

 

 안 된다는 단호한 매점 아주머니의 말에 잔뜩 시무룩해진 채 음료수를 다시 집어넣으려 뒤돌아 나온 애신이 제 팔목을 잡는 누군가의 손길에 고개를 돌렸다. 동매가 사과 주스를 물고 있는 채로 제 앞에 서 있었다. 팔목을 잡고 있음에도 먼저 말을 걸지 않는 동매에 애신이 괜히 동매를 노려보자 동매가 따라서 얼굴을 굳혔다. 얘 왜 이래? 미간에 잔뜩 힘을 주고 저를 바라보는 동매가 잠시 잊고 있던 전생의 기억들을 불러들였다. 아프기만 했던 기억들이 점점 돌아오고 있었다.

그 때, 애신의 손목을 붙잡고 들어 올린 동매가 그녀의 손에 천 원 한 장을 올려놓았다. 빚쟁이들 말이야 매양 똑같아서요, 애기씨. 순간 스치는 전생의 기억에 애신이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돈을 올려놓자마자 손목을 놓곤 매점을 나서는 동매를 애신이 급히 붙잡았다.

 

 

“뭐하는 거야?”

 

 

 동매는 묵묵부답이었다. 굳게 다물린 입술은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동매의 손목을 붙잡고 그의 손바닥에 그가 준 지폐를 고스란히 내려놓은 애신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필요 없어. 가져가.”

 

 

 애신의 말에 눈살을 찌푸린 동매가 다시 애신의 손에 100원을 올려놓곤 급히 뒤를 돌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평소보다 걸음이 더 빨랐다. 이게 뭐하자는 거야, 애신의 속이 끓어올랐다. 동매의 보폭을 따라잡기엔 제 걸음이 너무 느렸다. 결국 아무 것도 사먹지 않은 채 동매의 반으로 찾아간 애신이 망설임 없이 일본어과 교실로 들어와 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동매의 앞에 섰다. 동매가 천천히 애신을 올려다보았다. 야, 나와. 말을 마친 애신이 먼저 복도로 나가자 동매가 주저하더니 몸을 일으켰다. 교실을 나가니 애신이 팔짱을 낀 채 동매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매가 애신의 앞에 서자 애신이 동매의 손목을 잡고 그가 제게 준 동전을 그대로 올려두었다. 동매가 동전이 올려진 손을 꽉 말아 쥐었다.

 

 

“됐지, 앞으로 이런 짓 하지 마.”

 

 

 제 할 말만 다한 채 영어과 교실로 돌아가던 애신을 동매가 불러 세웠다. 고애신, 저를 부르는 소리에 애신이 몸을 돌렸다. 애신의 눈빛엔 동매에 대한 미움이 가득했다. 동매가 동전을 쥐고 있는 손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가 다시 애신과 눈을 맞췄다. 곧 울 듯한 눈으로 애써 웃고 있는 동매의 모습에 애신의 눈빛이 흔들렸다.

 

 

“오늘 보름이야.”

 

“...”

 

“그냥, 말하고 싶어서.”

 

 

 쿵쿵 뛰는 심장소리가 귀를 울렸다. 무언가 떠오르려는 것 같았다. 저렇게 울 듯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던 날이 하루 더 있었다. 그 때도 분명 동전을 주고받았었던 것 같은데, 애신이 지끈거리는 머리에 급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동매가 제게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래, 어디 아파? 다급히 물어오는 동매를 향해 손사래를 친 애신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현재의 동매 위로 전생의 동매가 겹쳐보였다. 애기씨, 금방이라도 저를 그렇게 부를 것만 같았다.

 

 

“구동매.”

 

“...”

 

“학교 끝나고 잠깐 보자.”

 

 

 방과 후에 여기서 만나. 애신이 말을 마치자 동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신과 헤어지고 교실로 돌아온 동매가 참아왔던 한숨을 길게 뱉었다. 애신이 저를 보려하는 이유가 대충 짐작이 갔다. 애신이 알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지난날들이 괜스레 후회로 돌아왔다. 이래서는 욕심만 자꾸 늘잖아, 애신을 위해 점점 멀어져야겠다 결심했는데 애신은 겁 없이 제게로 훅 다가왔다.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야속하게도 시곗바늘은 계속해서 움직였다.

 

 

 

*

 

 

 

 방과 후에 동매의 반 앞으로 찾아간 애신은 동매를 학교 옥상으로 이끌었다. 할아버지가 이사장인 덕에 애신에게 옥상은 다른 학생들보다 조금 출입이 자유로운 곳이었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저를 뒤따라온 동매를 향해 몸을 돌린 애신이 동매와 눈을 맞췄다. 동매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그런 동매의 긴장을 풀어주려는 듯 애신이 살짝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

 

 

“얘기해봐. 내가 기억 못하는 전생들.”

 

“...뭘 기억하는데?”

 

 

예상대로였다. 동매가 시선을 내리깔곤 씁쓸히 웃었다.

 

 

“날 진고개에서 재회하고, 지물포에서 네가 내 치맛자락을 잡고, 제물포에서 네가 날 쏘고, 수미의 머리채를 잡던 네 뺨을 때리고, 동전을 갚고, 머리카락을 잘리고. 이게 다야.”

 

 

 동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신은 정말 제게 악의적이었다.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다. 애신이 저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들만 가지고 있다는 걸. 그렇지만 이렇게 확인하니 아리던 가슴이 더욱 아렸다. 전생을 훑던 동매에 서서히 그 날의 구동매가 스며들었다. 동매의 눈에 단아하게 한복을 차려입고 붉은 줄이 그어진 사탕을 입에 밀어 넣으며 웃던 애신이 비쳤다. 아니 만났어야 좋을 재회. 그것이 제 서사(序詞)의 시작이었다.

 

 

“조선 양반 여인들은 농락하기 쉽다. 그 날 네 앞에서 내가 죽인 자들이 한 말이야.”

 

 

 그래서 죽였어. 덤덤히 말을 뱉는 동매에 애신의 눈빛이 흔들렸다. 어디서부터 이야기를 꺼내야할까, 동매는 고개를 숙이곤 천천히 한 순간 한 순간을 돌이켰다.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 그 한마디로 시작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입 안을 쓰게 만들었다. 동매는 길게 한숨을 뱉곤 천천히 말을 이어 나갔다. 오지 말라고 그리 빌었는데 제물포역에 넌 나타났고, 날아오르지 마시라고 쏘았는데 계속해서 양장을 하시고.. 말을 이어나갈수록 동매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 미묘한 변화를 애신은 단박에 알아차렸다. 동매의 눈빛이 차게 식었다. 다 숨겨주고 모른 척 하였는데. 동매가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잘랐습니다, 애기씨.”

 

 

 무신회 한성지부장 구동매, 그가 애신의 앞에 서 있었다. 고사홍 어르신께 서신을 전해드려 유도장으로 찾아와 제게 고맙다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 매번 저를 살리셨는데 애기씨께선 제 몸을 지키지 않으시니 잘랐습니다. 그 말을 뱉는 동매의 눈이 젖어 들어갔다. 애신이 돌아오는 기억들에 미간을 찌푸렸다. 고마웠네, 이유는 알 거고. 말을 마치자 동매가 울 듯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지만 저는 애써 외면했었다. 애신은 그제야 보건실에서 동매의 우는 얼굴을 마주했을 때 느껴졌던 그 감정의 원인을 찾을 수 있었다. 동매는 계속해서 제 기억의 자락들을 헤집으며 애신이 잊었던 기억들을 돌이키게 만들었다. 동경에서 애신을 마주한 날과 그 후 3년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아편굴에서 고통을 참아가던 날들. 그 때 베어진 상처들이 남아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가 쓰렸다.

 

 

“여섯 달을 기다려도 오지 않으시기에 이놈이 동경에 가서 애기씨를 구해드리지 않았습니까. 소인이 뭐라고 애기씨는 또 이 놈 목숨을 구해내시고 살라하지 않으셨습니까. 다시 동전을 받으러 오라셔서, 제가...”

 

 

 구동매. 제 이름을 부르는 애신에 동매가 고개를 들어 애신을 바라보았다. 애신이 천천히 제게로 걸어왔다. 애신이 동매의 등을 감싸 안았다. 애기씨, 동매가 애신을 밀어내려 들었지만 애신은 더욱 그를 감싼 팔에 힘을 실었다. 기억났으니까 그만 울고 돌아와. 현생으로. 그 한 마디에 동매는 돌아올 수 있었다. 어느 새 평범한 고등학생인 구동매로 돌아온 그의 눈빛에 애신이 입꼬리를 당겼다. 동매의 시선이 갈피를 못 잡고 흔들리고 있었다. 결국 애신의 팔을 잡고 제게서 떼어낸 동매가 소매로 제 눈가를 쓱쓱 문지르고 애신과 눈을 맞췄다. 전과는 달라진 애신의 눈빛에 가슴이 쓰렸다. 결국 제 욕심이 이성을 앞지르곤 튀어나왔다. 제가 괜히 애신의 기억을 돌아오게 만들어 애신에게 부담을 준 것은 아닐까, 제가 괴로웠던 만큼 애신이 괴롭진 않을까. 수많은 죄책감들이 길게 이어졌다. 더 이상 애신의 얼굴을 마주할 수 없었다.

 

 

“미안해.”

 

“네가 뭘.”

 

“나는 단지 너의 전생에 단 한 순간이라도 내가 있었던 걸로 충분했으니까, 그리고 이렇게 다 털어놨으니까...”

 

 

 동매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제 말 안 걸게, 정말로. 미안해. 애신의 표정을 살필 겨를이 없었다. 그렇게 도망치듯 동매는 자리를 떠났다. 애신은 동매를 잡을 수 없었다. 지금 잡아버리면 동매가 꼭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떠나버린 동매는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학교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지독히 독한 감기에 걸려서 기숙사에도 남아있지 못하고 목요일 아침에 바로 본가로 돌아갔다고 한다. 수학 수업이 길고 지루했기에 애신은 동매의 빈자리를 더욱 절실히 체감할 수밖에 없었다.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 없었다. 모든 기억이 돌아와 혼란스러운 것뿐만 아니라 동매에 대한 제 감정이 갈피를 못 잡고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애신은 수업 중에 저도 모르게 잘근잘근 손톱을 깨물었다.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이 나를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는가.’

 

 

 동매는 그를 잡으려는 제 말을 듣고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잠시 멈춰섰다가 길을 떠났다. 그 이후 동매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진고개 전체에 퍼진 소문 덕에 금방 알 수 있었다. 생의 끝까지 그는 저를 지켜냈다. 혹시라도 무신회와 제가 엮일까 도움의 손길을 뿌리치고, 그토록 기다렸을 그 완곡한 고백도 지나쳤다. 한 생을 지나서야 동매의 모든 마음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애신은 그걸 깨달은 순간 힘없이 웃었다. 내가 아무래도 너를...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뜬 애신이 핸드폰 주소록을 뒤적여 그의 이름을 찾았다. 구동매. 그 이름 석 자를 꾹 누르니 뚜르르르, 하고 이어지는 통화 연결음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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