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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ll we dance?

 

 

 

“이번 주 금요일 혹시 시간되면 누구 경호 좀 해줄 수 있어?”

 

히나의 부탁은 주인을 닮아 늘 갑작스럽고, 변덕스러웠다. 그녀의 매력이기도 했다. 누구와는 다르게. 한 쪽이 고양이처럼 변덕스럽다면 다른 한 쪽은 그야말로 꼿꼿한 나무에 가까웠다. 너무 크고, 너무 높아서 구동매가 차마 품에 다 안을 수도 없는.

 

"어디 위험한 데 가나봐? 나한테 경호까지 부탁할 정도면."

 

구동매는 피식 웃었다.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으나 그것이 허락의 신호라는 것을 히나는 잘 알았다.

 

"글쎄…나름 위험한 데가 맞긴 하지, 하지만 이번에 부탁하는 건 내가 아니라 내 동행인이야."

"동행인?"

 

구동매의 고개가 살짝 기울어졌다. 상정범위 내의 대답이 아니었나보다.

그도 그럴 것이 구동매가 지키고자 하는 세계의 범위는 매우 작았다. 돈, 조직, 그리고 사람 몇 명들로 이루어진 아주 협소한 세계. 그곳에 속하지 않는다면 눈앞에서 누가 거꾸러지든 구동매의 알 바가 아니었다.

히나는 가끔 자신이 그 범위에 속하는 것을 뿌듯해하기도 했다. 물론 그 세계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사람은 따로 있지만. 히나는 눈앞에 있는 가배잔을 느리게 쓰다듬었다. 적당히 미지근했으나 아직은 열기를 품고 있었다.

 

“나에게 경호를 부탁하는 걸 그 사람은 알고?”

“아니, 어느 누가 감히 구동매에게 이런 걸 부탁하겠어. 이건 내 개인적인 부탁이자, 음…선물이기도 해.”

 

히나의 눈이 작게 반짝였다. 이를 지켜보던 동매는 살며시 미간을 구기며 턱하니 팔짱을 꼈다. 의자에 기대앉은 단단한 자세와는 다르게 입가엔 히나와 같은 미소가 서려있었다. 그는 히나가 장난을 칠 때의 특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엔 어떻게 나를 골탕먹이시려고 이리 기대가 크시나.”

“어머, 어느 쪽인지는 포장을 까봐야 하는 법이지?”

 

이 또한 제대로 된 답변은 아니었다. 동매의 눈에 의구심이 떠올랐다 살며시 가라앉았다. 히나의 뜸들임이 어떤 의미인지 파악하기 어려웠다. 선물이라고? 히나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나한테 감사해할 준비나 하라구, 구동매."

 

***

 

세상은 격변의 시간에 돌입했고 각국 문물들이 둑을 뚫은 홍수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사람들은 논어 대신 알파벳을 읽고, 차를 마시며 심신을 다스리는 대신 가배로 차가운 새벽까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낮과 밤이 뒤바뀌기 시작하는 시대였다.

그중 타국의 문물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 돈 꽤나 있는 이들은 문명체화에서 더 나아가 직접 타국인이 되기를 희망했고, 그들의 문화를 직접 선보이기도 했다.

금요일에 열린다는 무도회가 바로 그 예였다.

 

“웃기지도 않는군.”

 

동매는 작게 투덜거리며 히나가 알려준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무도회가 열리는 장소는 미국인이 세운 한 저택이었으며, 막 일본에서 유학을 마친 어느 부잣집 도련님의 귀환을 축하하는 ‘잔치’를 위해 빌렸다고 했다. 동매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자리였다. 그런 와중에 경호라니. 원체 지킨다는 의미와는 대척점에 서 있던 그다. 아니지, 몇 가지 예외가 있긴 했다. 돈 때문에 귀족 나으리의 개새끼까지 지키려 몸을 던졌던 기억이 떠올랐다. 돈이 아닌 나머지 한 가지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동매는 쓰게 웃었다.

 

그 쪽은 돈을 안 받겠다 해도 필요 없다 내치시겠지.

 

***

 

히나는 끝까지 동행인의 정체가 누구인지 말해주지 않았다. 그냥 가보면 알 거라 했다. 인상착의라도 알려줘야지, 가서 얼굴도 모르는 그 동행인이랑 시비가 붙어 베어버리면 어쩔꺼냐란 불만 섞인 협박에도, 되려 구동매가 그럴 수 있다면 빈관 사장 자리라도 내놓겠다라 히나는 되려 큰 소리를 쳤다. 이쯤 되면 없던 관심도 절로 생길 지경이었다.

 

약속 장소에 거의 다다른 동매는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저 멀리 저택 후문의 담벼락 아래에 우두커니 서 있는 인영이 보였다. 히나의 말대로였다. 양장 드레스 차림이었고, 홀로 서 있었다.

여자란 말은 없었는데. 히나의 친구인건가. 동매는 마른 침을 한번 삼켰다. 이상하게도 자신이 아는 사람 같았다. 그럴 리가 없는데. 동매로부터 뒤를 돌린 상태인 여인은 주위도 어둑어둑하여 분간이 잘 가지 않았다. 동매는 한 발자국씩 다가가며 히나에게 부탁받은 이를 불렀다. 그러니까, 누구 속을 박박 긁으러 작정한 것처럼.

 

“얼마나 귀한 얼굴이시길래, 이리 사람 둘을 오라가라 하시는지...”

 

그 순간이었다. 마치 오르골의 태엽을 돌리는 것처럼, 동매에 말에 반응한 여인이 그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치맛단이 둥글게 퍼졌다 가라앉으며 몸의 곡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치마 위 가지런히 놓인 두 손은 대리석처럼 빛났다. 코르셋으로 탄탄하게 조인 가는 허리와, 그 위의 봉긋한 가슴에 이어 이내 얼굴이 드러났다. 여인이 입은 옷은 저택에서 비치는 불빛을 받아 순간순간 타는 듯이 반짝였다. 분홍빛이었다. 동매가 애기씨를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빛깔이었다. 작은 흑요석 같은 눈동자가 동매를 마주보았다. 공기가 순간 일렁였다.

 

애신의 목소리가 동매를 그대로 꿰뚫었다.

 

“빈관 사장에게 내 들었소. 오늘 내 신변을 맡아준다지.”

“……”

 

애신의 인사에도 앞의 남자는 대꾸조차 없었다.

재촉 대신 애신은 인내심을 갖고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당연히 내켜 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렇게 무시당하는 일이 한 두 번도 아니었고 말이다. 양반의 호강을 위해 불려온 거나 다름없다고 생각하고 있겠지. 유진, 하다못해 희성에게라도 부탁하면 될 것을 빈관 사장의 그런 간곡한 요청이 흔치 않았기에… 내 가배를 알려준 은혜를 갚는다치고 수락한 것을. 이제와서야 후회가 살짝 고개를 들었다.

 

빈관 사장이 어째서 그러한 부탁을 자신에게 했는지, 또 구동매는 어째서 저렇게 얼빠진 표정을 계속 짓고 있는지 애신으로선 알 길이 없었다. 처음 신어보는 양장화가 발을 뻐근히 조여왔다. 싫다는 의미인가. 애신의 손이 치맛자락을 살짝 쥐었다.

 

“…자네에게 불편한 부탁을 한 거 앎세. 지금이라도 빈관 사장에게 가서 다른 이를…”

“아, 아닙니다!”

 

애신의 눈이 살짝 커졌다. 서둘러 애신의 말을 끊은 구동매의 목소리에는 침착하려고 하는 새된 음성이 담겨져 있었다. 본인도 놀랐는지 켁켁대며 헛기침을 한다. 동매는 목을 부여잡으면서도, 아예 못박으려는 것처럼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내뱉었다.

 

“아닙니다, 애기씨.”

 

저택의 빛을 받은 애신 주위가 황금색 불꽃으로 물든 것 같았다. 구동매의 시야로 오로지 한 사람으로만이 가득 차 올랐다. 이런 젠장. 꽉 쥔 주먹 사이로 식은땀이 차기 시작했다. 여즉까지 생각지도 않았던 긴장이 그제야 동매의 몸을 덮쳤다. 데일 걸 알면서도 손을 뻗게 만드는 불꽃이 눈앞에 있었다. 이번에도 동매는 그저 부나방마냥 속수무책으로 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래, 고맙게도.”

 

애신은 동매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였다. 사람을 베는 천한 백정에게도 고개를 숙이는 이. 그 모습을 보며 동매는 히나, 아니 이양화에게 무슨 쓸데없는 짓이냐며 화를 내야할지, 고맙다고 큰 절을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

 

안을 지키는 인력은 따로 정해져있기에 동매의 자리는 저택의 바깥이 되었다. 오히려 그가 저택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경호가 필요한 상황이 될 것이 뻔했기에 동매는 그답지 않게 얌전히 수긍했다. 딱 빛이 비치는 경계까지가 바로 그의 자리였다. 평소 그 간격을 가장 싫어하던 구동매였으나, 오늘만큼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했다. 도리어 충성스런 저택의 개가 된 마냥 오가는 이들의 얼굴을 일일이 확인했다. 초청객들은 입구로 들어올 때마다 눈에 불을 킨 야차 같은 얼굴에 놀라 뻣뻣이 굳은 채로 입장했고, 주위를 돌아다니는 시중인들은 울상을 지으며 쭈뼛쭈뼛 돌아다녔다. 경호에 대한 불만이 접수된 것도 같았지만, 그것이 구동매의 귀까지 들어갈 일은 없을 터였다.

 

저택의 회랑 안에서는 현의 선율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갖은 악기들이 모여 내는 소리의 조화들은 어떤 음악인지 전혀 모르더라도 듣는 이를 들뜨기 만들기에 충분했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동매는 간혹 안을 흘깃 쳐다보곤 했다.

왁자지껄함과 음악소리가 한데 얽힌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빙글빙글 춤을 추기 시작했다. 쉴틈 없이 움직이는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구동매의 눈은 정확히 한 곳을 짚었다. 항상 그녀를 찾아내는 건 동매의 몫이었기에, 그 인파 속에서도 애신의 모습을 찾아내는 건 쉬웠다.

애신은 누구보다도 빛나고 있었다. 고귀하고, 무결하며, 홀로 완벽한 존재. 그녀는 가장 높게 날 수 있는 새였고, 그녀의 앞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동매를 항상 비참하게 만들었다.

 

***

 

무신회의 수장이 수하도 없이 밖에 서 있다는 소식에 동매 주변으로 간간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대부분은 아부 섞인 눈도장을 찍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동매는 때로는 냉소와, 때로는 무시로 위아래를 막론하고 사람들을 쳐냈다.

오늘 그의 역할은 이런 시답잖은 접대를 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미국인 나으리도, 부잣집 도련님도 아닌 천한 백정 출신이 온전히 애기씨를 지키고 있었다. 오늘 자신의 존재가치는 이를 위한 것이다. 지금 애기씨의 손을 잡을 수 있는 이는 자신뿐이었다. 동매는 여러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자 여기저기 술에 취한 사람들과 지친 기색이 역력한 시종인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그 자리에서 석상이 된 것마냥 동매의 자세에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 동매의 소맷자락을 가냘프게 잡아당겼다. 시종인 중 한명이었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게 센 것이 동매보다 갑절은 나이를 먹은 듯 보였으나, 하는 행동은 겁먹은 쥐마냥 벌벌거렸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는 벌을 받는 것 마냥 근심걱정이 가득했다.

 

“… 무슨 일이신지,”

“저, 저, 애…애신 아가씨와 함께 오셨지…요?”

 

그 말 한마디에 생명력을 얻은 것 마냥, 석상같이 서 있던 자세가 흐트러졌다. 차가운 동공이 희번득하게 빛났다. 순식간에 시종인을 잡아먹을 것처럼 구동매가 바짝 얼굴을 들이댔다. 동매와 눈이 마주친 시종인은 그 자리에서 기절이라도 할 것처럼 휘청거렸다. 내가 뭔 죽일 말이라도 했나, 억울함이 목끝까지 차올랐다. 애기씨는 왜 이 야차같은 놈을 데려오신거래!

 

“애기씨께서, 왜.”

 

당장에 반말이 튀어나온다. 연장자에 대한 우대는 방금이 마지막이었나 보다. 시종인은 눈이라도 질끈 감아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곧이어 자신의 머리가 바닥에서 뒹굴고 있을 것 같았다. 그는 몇 번을 더듬거리며 자신이 전해야 할 내용을 혼신을 담아 쥐어짜냈다.

 

"그, 그, 다름이 아니라, 애기씨, 애기씨께서,"

 

***

 

저택 뒤 작은 정원은 손을 많이 타지 않은 듯 무성한 덤불들로 가득했다. 저택의 환한 빛이 없는 대신 그 자리를 달빛이 대신한 정원은 상대적으로 인파가 뜸했다. 드문드문 깔린 돌길을 뛰다시피 걸으며 정원의 한 구석으로 동매는 급히 걸음을 옮겼다. 불안한 듯 두리번거리며 무언가를 찾던 구동매의 눈에, 커다란 나무 아래 놓여있는 벤치와 함께 그 곳에 앉아있는, 동매가 여지껏 찾아 헤맸던 익숙한 인영이 들어왔다.

동매는 크게 숨을 한번 몰아쉬었다.

 

“이럴 거면 경호를 쓰실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애기씨.”

 

퉁명스런 핀잔에 애신이 천천히 뒤를 돌아본다. 그러나 어딘가가 이상했다. 여느 때와는 다른, 동매의 눈에 처음 담기는 모습이었다. 고고한 자태도, 자리 하나 내어줄 것 같지 않은 눈빛도 온데간데없이 멍하니 동매를 쳐다보기만 했다.

 

시종인의 말이 맞는 듯 했다. 처음 맛보는 와인을 맛있다고 물처럼 들이마셨더란다. 애신에게로 가까이 다가가자,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양 달큰한 향기가 훅 피어올랐다.

 

“아주 나 잡아가라 하고 계십니다.”

 

동매는 그답지 않게 연이어 한숨을 쉬었다.

 

“누가 이런 모습을 보기라도 하면 그날로 함안댁이 저를 죽이려 들겠지요.”

 

동매는 애신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평소에도 꽃잎처럼 물들어 있는 볼은 잘 익은 복숭아마냥 한껏 달아올라있다. 눈에는 평소의 총기 대신 물기가 가득하고, 입술은 꿀을 베어 문 것처럼 촉촉하게 젖어있다.

아니, 틀렸다. 누군가 애기씨의 이런 모습을 본다면 함안댁이 나서기도 전에 자신이 그 눈깔을 죄다 파버릴 것이다. 동매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짓씹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했다. 평소 잘 쓸 일이 없던 인내심을 발휘할 드문 때였다.

 

“…..구,동매.”

“…취하셨다고 이젠 이름도 막 부르시는 겁니까 애기씨, 술꾼이 따로 없으시군요.”

 

능청스런 말과는 다르게 동매의 애꿎은 손은 오갈 데 없이 헤매고 있었다. 애신 앞에서 동매는 항상 방향을 잃기만 했다. 도움을 주는 명목이라도 함부로 손가락 하나 대서는 안 될 것 같았지만, 그렇다고 뒤를 보며 비틀대는 꼴이 곧 있으면 고꾸라질 것 같아 동매는 아예 애신의 앞으로 빙 돌아와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애신과 같은 눈높이였다. 애신 또한 위태위태한 자세를 고쳐앉아 동매를 마주보았다.

먼저 다가온 건 동매인데 정작 시선을 돌리는 것도 그가 먼저였다.

 

“어쩌자고 이리 술을 드신 겁니까.”

 

동매의 나지막한 질문에 애신이 입술을 달싹였다. 이상하게도 애신에게서 나는 술냄새는 꽃향기와 같았다.

 

“…춤을…”

“춤?”

 

애신의 고개가 천천히 까딱였다. 그에 맞춰 동매의 고개 또한 애신에게로 더 가까이 기울여졌다. 어느새 숨소리마저 들리는 간격이었다. 동매의 목울대가 저도 모르게 움직였다.

술이 들어가니 그야말로 사람이 달라진다. 이렇게나 자신에게 거리를 허락하시다니. 애기씨가 아니라 자신이 술에 취한 듯한 기분이었다. 그대로 볼에 손을 올리고 싶은 흑심을 꾸욱 누르고, 동매는 애신의 더듬거리는 답변에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내…기예를 정식으로 배운 적은 없네만…언어 말고도 이리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줄은, 꿈에도 몰랐소… ”

 

수심이 애신의 얼굴에 가득 차올랐다. 기예? 배워야 할 것? 짧은 순간 어둠에 감싸였던 동매의 머릿속이 탁, 하고 밝아졌다.

 

아, 그런 거였군. 춤, 기예. 무도회.

 

“가락을 연주하는데, 나는 그저 보면서 즐기는 줄로만 알았는데, 남녀가 쌍쌍이 나와서… 빙글빙글 돌면서…”

 

동매는 애신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 히나를 통해 몇 번 들은 적도, 본 적도 있었다. 서양에서는 음악에 맞춰 남녀가 서로 춤을 춘다했었지. 손을 잡고, 몸을 붙이고, 얼굴을 맞대면서.

얼굴도 못 본 정혼자 외에 애신이 손잡을 수 있는 남자는 그녀의 조부 정도였다. 그야말로 충격의 장이었을 것이다.

애신에게서 맥 빠진 한숨이 연달아 터져나왔다. 아무리 세상이 변했다지만 처음 본 남자와 손을 잡는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한 새로운 문제였다. 이대로 신문물을 익히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 것인가.

 

“내 오늘은, 마음을 단단히 먹고 새로운 문화를 배우러 온 것인데…”

“……가,”

 

애신의 고개가 꺼질 듯한 목소리의 근원을 따라 파뜩 들렸다. 희뿌연 어둠이 눈앞에 가라앉아 앞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단단히 굳은 동매의 입가는 방금 그 가냘픈 소리의 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차가워보였다. 그러나 표정 없는 얼굴과는 달리, 어느새 동매는 일생일대의 각오를 한 것 마냥 애신 앞에 양 무릎을 꿇고 앉아있었다. 시선을 마주하고, 불규칙적인 몇 번의 깜박거림에 이어 드디어 구동매가 다시금 말했다.

 

방금 전보다 더 확고한 어조였다.

 

“그럼 제가, 춤을 가르쳐 드려도 괜찮을지요, 애기씨.”

 

믿기 어려웠지만, 구동매의 입에서 나온 물음이 맞았다.

 

***

 

둘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가라앉았다. 입을 떼자마자 후회가 해일처럼 몰아쳤다. 순식간에 동매의 입안이 바싹 말라왔다. 정말 다른 맘 없이, 애기씨가 이리 말씀하시는 건 처음 보니까, 온 이들 중에 얼굴을 아는 자는 나밖에 없을 터이고, 동매는 누구를 향하는지 모를 변명을 연달아 되뇌었다. 사람을 베면서도 눈 하나 깜짝 않던 위인이 눈앞에 있는 여인에게서 거절의 말을 들을까봐 두려워하고 있었다.

 

“…부잣집 귀한 애기씨가, 이번에도 철모르고 호강을 누리러 왔다, 라고 생각할 거라 내 짐작했네.”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흘러나온 내용이 동매의 등줄기를 할퀸다. 그녀의 시선을 한 번이라도 끌려고 내뱉었던 말이 독이 되어 동매에게로 흘러내렸다. 웅얼거림에 가까운 대답이 그의 심장을 움켜잡았다. 동매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래도 오늘, 나를 위해서 흔쾌히 시간도 내어주고, 몇 시간 동안이나 자리를 지켜주었지… 나를 위해 큰 수고를 해주었어,”

 

애신이 입을 떼는 동안이 동매에게는 무저갱의 시간과도 같았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동매는 저승과 이승을 너무도 쉽게 오갔다. 구동매가 어떤 발악을 해도 애신의 손아귀에 있음을 고애신만 몰랐다.

 

“오늘의 구동매는 참으로 이상하군…”

 

애신의 시선이 여전히 동매의 무릎께에 닿아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는 자리마다 타는 듯이 뜨거웠다. 애신이 계속 소곤거렸다. 어째서인지 동매의 귀가 녹아내릴 것 같았다.

 

“평소와는 왜 이리 다른지… 내 연유는 모르겠지만…”

 

애신은 조금 고민하는가 싶더니 갑자기 한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동매에게 보였다. 흰 손등이 떨어지는 깃털마냥 움직였다. 동매는 마치 홀린 것 마냥 멍하니 눈앞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애신이 살포시 눈을 접어보였다.

 

“…아까 춤을 청할 때, 이리 하는 것을 내 보았네.”

 

동매가 꿈에서나 보던, 그것도 가장 달게 잘 때나 보였던 그 귀한 미소였다.

 

“함께 춤을 춰 주시겠는가, 구동매.”

 

그것은 동매에게 신의 계시나 다름없었다.

동매에게 있어 애신의 허락은 그랬다.

 

그것을 뿌리칠 힘이 동매에게는 없었다.

 

***

 

동매는 지금 들리는 소리가 음악소리가 맞는지, 아니면 자신의 심장 소리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동매를 아는지 모르는지 눈앞의 여인은 한 손을 들고 해사한 얼굴로 자신을 빤히 쳐다만 보고 있다. 달빛이 애신의 얼굴 위로 산산이 흩뿌려져 빛났다. 동매는 속으로 신음을 집어삼켰다. 이제는 꿈이어도 좋으니 깨지만 않기를.

곧 부서질 유리조각을 만지는 것처럼 동매의 손짓과 몸짓 하나하나에 조심성이 보였다. 아래서부터 받쳐오는 동매의 큰 손바닥에 애신의 손이 가닥가닥 포개진다. 손바닥이 축축해져 그것이 못내 부끄러웠던 동매는 저도 모르게 손을 움츠려 간신히 애신의 손끝만을 부여잡았다. 그대로 타 죽을 것만 같은 온기. 술기운에 감사하게도 애신은 맞잡은 손을 뿌리치지 않았고, 동매는 그대로 혀를 물것만 같았다.

겨우 손 하나에, 천하의 구동매가. 히나가 이 광경을 봤다면 배를 잡고 웃었을 것이다.

 

“이렇게 손만 잡는 것이 맞는 겐가?”

 

웃음기 섞인 물음이 귓가에 맴돌자 긴장으로 배의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오고 절로 허리가 곧추섰다. 허리에 손을 올리는 것만큼은 차마 할 수 없었기에, 대신 치마의 끄트머리만을 움켜잡고 그녀를 천천히 이끌었다. 마지못해 히나에게 잡혀배웠던, 아주아주 기초적인 댄스 동작을 간신히 상기해내기 시작한 구동매는 그제야 그녀에게 절절히 감사를 외쳤다.

 

“제가 당기시면 한 발을 앞으로 내미시고, 좀 더 뒤로 갔다가, 그렇지요, 뒤로, 그리고 앞으로.”

 

멀리서 흐릿하게 음악소리가 밤공기를 타고 울려퍼지는 가운데, 걸음에 불과하던 것이 점점 동작의 단위가 되어간다. 찌르륵거리는 소리가 간간히 들려오며 함께 박자를 맞췄다. 분홍빛의 치맛자락이 빙글 돌았다 애신에게서 동매에게로 감겨들고, 그녀의 몸이 동매의 가슴으로 훅 들어왔다 빠졌다.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하면서도 맞잡은 손은 놓을 줄을 모른다. 빙글빙글 돌 때마다 애신의 미소가 천천히 파도처럼 퍼지고, 그녀를 둘러싼 향기가 짙어진다. 구동매의 눈앞에서 분홍빛이 꽃잎처럼 흩어지며, 그는 순간 시간이 멈춘 듯한 환상을 본다. 그저 환하기만 한 빛에 타 죽을 것 같다. 숨을 쉴 수 없었다.

 

애신 또한 자신의 손과 치마를 잡은 구동매의 손에서 떨림을 느꼈다. 오늘은 그도, 자신도 이상하기만 했다. 술기운을 빌렸다지만, 신기하게도 오늘만큼은 눈앞의 이가 그리 밉지 않았다.

나를 적대하는 자. 나를 상처 준 자. 나를 할퀸 자.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려는 자.

애신을 보는 동매의 눈빛 속 자신과는 다른 불꽃이 일렁거린다. 애신은 그 눈빛이 항상 두렵지 않았었다. 대신 그의 속내를 알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론 평생 알 수가 없으리란 예감이 그녀를 스쳐 그가 더욱 멀게 느껴지곤 했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애신은 알 수 있었다. 오늘의 구동매는 칼 대신 빈손으로, 지금 저택 안에 있는 이들처럼, 춤추고 싶어 하고 있었다. 무신회의 구동매가 아닌, 그 어릴 적 애기씨가 가마에 태운 소년처럼.

 

그는 그저 그녀와 함께 있고 싶어하는 것이다.

 

영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음악이 서서히 흩어진다. 점점 술기운이 올라오는 것인지 애신의 눈가가 조금씩 반달로 접히고, 움직임이 느려졌다. 이윽고 애신의 몸이 앞으로 기우는 것을 동매가 조심조심 받아 그대로 안아들었다. 가슴께에 머리를 받치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린 애신에게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대로 잠든 모양이었다. 달콤한 숨결이 동매의 입가에서 맴돌고, 동매는 안은 채로 그녀를 들이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그대신 동매는 애신의 이마에 입술을 깊게 눌렀다.

 

이 시간이 다시 자신에게 찾아와줄 수 있을까.

 

구동매는 그대로 조용히 저택의 후문으로 빠져나오며, 그가 안은 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숨을 죽였다.

 

그가 디디는 걸음걸음마다 조용한 환희가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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