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안댁이나 애기씨와 함께 진고개는 자주 와봤지만, 혼자서 그것도 무신회의 건물에 들어가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행랑아범은 낭인들이 우글대는 곳에 차마 발을 딛을 수 없어 근처에서 서성거렸다. 행랑아범의 수상한 움직임을 포착한 낭인 몇이 다가왔다.
느지막이 일어난 동매는 방 안에서 장부를 살피고 있었다. 평소 같으면 유도장에서 대련을 했어야 하는데, 어제 애신과 밤을 거닐었던 탓에 두근대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잠을 설쳤었다.
“오야붕! 들어가겠습니다!”
“수상한 놈이 얼쩡거리기에 잡아왔습니다. 들어보니 전해드릴게 있다고 합니다.”
무신회의 낭인 몇이 애신네 식솔 한 명을 잡아 데려왔다. 행랑아범은 동매의 얼굴을 보곤 잡혀있던 팔을 뿌리쳤다.
“나가봐.”
“예! 오야붕!”
낭인들이 방을 나가자 행랑아범은 어깨를 툭툭 털고 옷매무새를 정리하더니 품속에서 서신을 꺼냈다. 서신을 들고 동매를 빤히 쳐다봤다. 백정 출신에 내키는 대로 칼을 뽑아 사람을 베고 다니는, 한성에서 모르는 자가 없는 정도로 악명 높은 놈인데, 어찌 올바르고 곧게 자란 애기씨의 눈에 들어온 건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올바르고 곧은 애기씨의 부탁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어쩐 일이십니까?”
“받으시오. 애기씨께서, 우리 소중-한 애기씨께서 자네에게 전해달라고 하더이다.”
“... ... .”
“받았으니 이제 다시 낭인들을 불러주시오. 들어왔을 때처럼 자연스레 나가야하니.”
행랑아범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문이 열렸다. 방 밖에서 대기하며 다 듣고 있던 모양이었다. 행랑아범이 얌전히 그들에게 끌려갔다. 동매는 헛웃음을 터뜨리곤 애신의 서신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 날씨가 참으로 좋소.
강 건너 가마터에 들릴 일이 생겼는데, 노꾼이 필요하오.
도와줄 수 있겠소?
실은 자네가 보고 싶어서 쓰는 핑계요.
신시(13~15)에 나루터 근처 주막에서 기다리겠소. ]
“이제는 기별을 하고 기다리시는 겁니까.”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하면 신시 전에 나루터에 도착할 수 있어보였다. 유카타 매무새를 다시 만지고 하오리를 걸쳤다. 무언가 허전하다 싶어 주변을 둘러보니 벽에 세워둔 칼이 눈에 들어왔다. 외출을 할 때면 항상 지니고 다녔으며, 한 때는 잘 때에도 손에 쥐던 칼이었다.
“드르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칼은 방 안에 그대로 있었다. 동매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보다 가벼웠다.
*
가마가 주막에 도착했다. 함안댁과 가마꾼들에게 요깃거리를 하고 있으라고 일렀다. 소란이 나자 홍파가 나왔다. 맞이해주는 홍파의 얼굴이 좋지 않아보였다.
“어서 오세요. 애기씨.”
“무슨 일 있소? 낯빛이 좋지 않구려.”
“실은 진고개의 구동매란 놈이 아까부터 와있어서요. 배를 빌린다는 얘기가 없어서 모셔다 드릴 수는 있는데, 조금 걱정이 되네요.”
“아. 내가 불렀네. 이번엔 배만 빌리겠네.”
“예?”
“걱정 말게.”
홍파는 가마터에 위험을 알려야 되나 고민을 잠시 했지만, 국밥 다섯 그릇을 달라는 태연한 함안댁의 부름에 약간은 안심이 되어 아무 말 없이 애신을 보내주었다. 나루터 근처에서 서로를 발견한 애신과 동매는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배에 올랐다. 배에 탈 때에도, 노를 저을 때에도 거치적거릴 줄 알았던 동매의 칼이 보이지 않아 놀랐다.
“왜 그러십니까?”
“칼을 차지 않은 자네는 처음 봐서 놀랐네.”
“이번엔 소인이 애기씨를 놀라게 해드린 모양입니다.”
가벼운 웃음이 배 위를 오갔다. 함께 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며 노를 젓다 보니 어느새 강 건너 가마터에 도착했다. 동매는 돌아갈 때에는 보다 느리게 노를 젓겠다고 다짐했다. 배를 대고 먼저 내려 우물쭈물 서 있다가 애신에게 살며시 손을 내밀었다. 애신이 동매의 손을 잡고 땅에 발을 딛고 나서도 한참동안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따스한 온기와 약간의 떨림이 전해졌다.
“고맙네.”
“아닙니다. 먼저 기별을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동매가 손을 먼저 놓고는 멋쩍게 허리춤에 손을 가져갔다. 칼이 잡히지 않아 약간은 허우적댔다. 그리고는 앞장서서 걸었다.
“가마터에 와본 적이 있는가?”
“들려본 적이 있습니다. 백자 구경은커녕 간장 종지 하나도 내어주지 않더군요.”
“험한 소리를 들었겠네. 여기 도공이 외부인에겐 여간 험한 게 아니라서.”
“험한 소리는 자주 듣기도 하고, 자주 내뱉... ... .”
정적이 흘렀다. 동매는 순식간에 죄책감에 휘감겼다.
“잠시 기다리게. 금방 다시 돌아오겠네.”
애신이 괜찮다는 듯 웃음을 지어보이며 홀로 가마터로 가는 다리를 건너갔다.
*
“같이 온 놈은 뭡니까?”
“노꾼일세.”
“홍파는 어따두고 평판이 안 좋은 놈을 노꾼으로 쓰신 답니까?”
“그 평판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달라질 리가 없으니... ... .”
“무어라고 중얼거리시는 겝니까?”
“자네는 저 자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뜻이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마음에 걸렸다. 애신에게는 좋은 사내였지만, 다른 이들에게는 무섭고 잔인한 사내가 분명했다. 고에게 사발꾸러미 두 개를 양 손에 하나씩 받아들고 천천히 동매에게 돌아갔다.
“들어 드리겠습니다.”
“이 정도는 들 수 있네.”
“그럼 하나만 들어 드리겠습니다.”
동매의 고집에 못 이겨 하나를 전해줬다. 받아들자마자 동매의 팔이 아래로 떨어졌다. 정말 생각보다 무거웠고, 애신이 가볍게 들고 있을 뿐이었다. 애신이 다시 달라며 손을 내밀었지만, 오히려 동매는 애신의 손에 있는 다른 꾸러미까지 뺏어들고 빠르게 앞장섰다. 이보게- 동매- 하는 애신의 외침에도 동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먼저 배에 도착해서 물건을 싣고 애신을 기다렸다.
‘저리 귀여운 짓을 하는 사내인데-’
다시금 내미는 동매의 손을 잡고 배에 올랐다. 동매가 아까보다 천천히 노를 젓기 시작했다.
“혹시 말일세... ... .”
“예,”
“아직 말도 하지 않았네.”
“말씀 하십시오.”
“나를 만날 때엔 오늘처럼 칼을 두고 나와 줄 수 있는가?”
“음.”
동매가 노를 젓던 손을 멈췄다. 열 살 때부터 쥐던 칼을 종종 놓기에는 크나 큰 결심이 필요했다.
“적어도 애기씨 앞에서는 칼을 뽑지 않겠습니다. 소인의 일이 일인지라.”
“고맙네. 그렇게만 해주어도 충분하네. 그대에겐 계속 받기만 하는 기분이 들어.”
물이 튀었다. 갑자기 바뀌어버린 애신의 호칭에 놀라버린 동매가 노를 헛 저어버렸다. 연거푸 사과를 하며 애신에게 튄 물을 털어주려고 손을 가져갔다.
“괜찮네.”
저의 실수가 괜찮다는 건지, 애신에게 손을 대도 괜찮다는 건지 알지 못하는 동매는 손으로 허공만 휘저었다.
“함안댁과 행랑아범에게도 그대에게 말을 조심히 하라고 일렀네.”
“그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네. 내가 그대를 아끼기 시작했으니.”
“... ... .”
“그대는 그대가 편한 대로 천천히 다가와 주게. 언제든 기다리겠네.”
애신의 두 번째 고백이었다.
동매는 아무런 말없이 노를 저었다.
***
약방/
동매는 거래를 하나 끝내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문득 애신과 함께 걸었던 밤길이 떠올라 뒤따라오는 애들을 먼저 보내고 약방 근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곳에는 동매와 같이 애신과 만났던 기억을 되짚으며 약방 근처를 거니는 사내가 있었다.
“여긴 어쩐 일이오?”
“나으리야 말로 어디 아프십니까?”
“아프길 바라는 눈치로군.”
동매는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미공사관으로 애신을 여러 번 불렀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빈관에서 애신과 만나는 걸 여러 번 목격해서 서로를 신경 쓰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오고가는 도중에 약방의 문이 열렸다. 양반 댁 애기씨와 조선과 일본 그 어디에도 포함되지 않는 자, 그리고 검은 머리의 미국인. 어색한 조합이 한 자리에 모였다.
“동매, 그대가-”
“애기씨께서-”
“당신이-”
“탕-”
세 사람의 말을 단 한 발의 총성이 끊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렸다. 애신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큰 길로 뛰어나갔고 그 뒤를 동매와 유진이 따랐다. 취한 일군 하나가 게이샤의 머리채를 잡고 총질을 하며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애신과 유진에게는 익숙한 게이샤와 일군이었다. 총기를 가지러 약방에 되돌아가려는 애신의 앞을 유진이 가로막았다.
“구하러 갈 거요?”
“구해야 하오.”
두 사람만 아는 일이 있다는 건 둘째 치고, 저 게이샤를 구할 거라는 애신의 말에 동매는 허리춤의 칼에 손을 가져가댔다. 배 위에서 애신에게 한 약조가 생각나서 칼을 꺼내들지는 못했다.
“칼보다는 총이 빠르오. 게다가 저 자는 일군이니, 총을 가진 미군 장교인 내가 움직이는 게 제일 적당하오.”
유진이 말 한마디로 애신과 동매의 움직임을 제지하고 둘의 앞을 스쳐갔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저 자의 말이 맞네.”
“일단 모습을 숨기시지요. 괜히 엮였다간 퍽 귀찮아질 느낌입니다.”
애신과 동매는 두세 번의 총성을 뒤로 한 채 약방의 담 안쪽으로 몸을 숨겼다. 나란히 고개를 내밀어 상황을 살폈다. 총성 소리를 듣고 달려온 조선군들이 유진과 일군을 포박해 데려갔다. 그리고 길 어디에도 쓰러져있던 게이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도 그 여인은 무사히 도망친 모양입니다.”
“대신 다른 자가 잡혀갔지... ... .”
“그 자의 말대로 그 자는 미군 장교이니 그리 걱정하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그런가.”
“제 애들을 시켜 사라진 여인의 행방을 찾아볼까요?”
“괜찮네. 알아서 안전한 곳으로 피했을 걸세.”
한 숨을 쉬고 고개를 돌리니 동매의 가슴팍이 눈앞에 있었다. 놀라서 머리 뒤에는 담이 있다는 것도 잊은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머리에 닿는 건 차갑고 거친 벽이 아니라 따뜻하고 거칠면서도 말랑한 동매의 손이었다.
“그런데 그대는 어찌 여기에 있던 겐가?”
“애기씨야말로 약방엔 무슨 일이십니까?”
“나는- 식솔 하나가 일하다가 다쳐서 약을 지으러 왔네만, 주인이 없어 돌아가려던 참이었네.”
애신이 약간의 뜸을 들여 대답을 했다.
“그대는 아직 내게 답을 해주지 않았는데?”
“아- 음. 그게- 음. 애기씨와 걸었던 게 생각나서 근처를 걷고 있었습니다.”
동매가 얼굴을 약간 붉혔다. 애신이 동매를 가만히 쳐다봤다. 뭐가 잘 못되었나 싶은 동매의 동공이 흔들렸다. 애신이 고개를 갸웃거려 동매의 손에 머리를 비비적댔다. 아, 손- 하고 동매가 벽과 애신의 머리 사이의 손을 살며시 뺐다. 애신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다가 약방의 담 너머를 흘깃 쳐다보더니 후다닥 쪼그려 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밖에 누가-”
“함안댁일세. 앉게!”
애신이 동매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두고 마주보고 쪼그려 앉았다.
“총성 때문에 더 눈에 불을 켰을 것이야.”
“다 아시면서 어찌 숨으시는 겁니까?”
“그대와 더 있고 싶어서 그러네.”
애신이 귓가에 대고 소곤거렸다. 마치 제 심장은 애신의 손에 있는 것 같았다.
“그대는?”
“저-저도 그렇습니다. 애기씨.”
심장이 마구마구 두근대는 와중에 좋지 않은 촉이 들었다. 일본에 있었을 때 잠을 자던 도중에 칼을 맞기 직전의 촉과 같았다.
“여기 계셨소.”
함안댁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애신이 후다닥 일어나서 함안댁을 달랬고, 동매는 천천히 애신의 뒤를 따라 일어섰다.
“아니! 애기씨요! 총성 때문에 몬 일 났나 걱정이 돼서 달려왔구만, 여기 이 놈-”
“이 놈?”
“아니... 이... 이 자! 이 자와 요래요래 숨어계시면 어쩌자는 겝니까!”
“아무런 일 없었네.”
“내가 이 자를 어케 믿습니꺼!”
“이 자는 믿지 못해도, 나는 믿어주게.”
“그야. 물론 믿지요! 그렇지만-”
“아무에게도 믿음을 받지 못하는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가만히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동매가 약방을 나섰다. 누구 때문에 토라졌냐는 실랑이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조심히 들어가고-! 다음에 또 봅세-!!”
애신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동매가 고개를 슥 돌리더니 가볍게 목례를 했다.
“뭐가 그리 좋다고, 또 보잽니까?”
“나는 좋네.”
“어후. 쇤네는 무서워서 잘 모르겠네예.”
“화난 함안댁이 더 무섭네.”
애신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집으로 향했다.
***
총상1/
일이 있어 며칠간은 만나기가 어렵다는 서신을 써서 동매에게 보냈다. 그리고 의병으로서의 활동을 위해 기차를 타고 제물포로 향했다. 얼굴에 수척함이 깃든 이유는 내일 있을 일 때문에 긴장을 해서인지, 동매를 만나지 못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
“책방 근처에서 기다리게. 총격전이 끝나면 바로 그리로 가겠네.”
“꼭. 꼭 오셔야 합니더. 다치지 말고 꼭이예.”
함안댁이 변복을 한 애신의 손을 꼭 잡고 당부했다. 애신은 알았다며 대기위치로 향했다. 분명 하야시가 제물포항에 일군을 깔아두었을 줄 알았으나, 일군의 모습은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했지만 계획대로 기차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기차가 도착을 해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조준경을 통해 내리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봤다. 익숙한 낭인들의 모습이 보이더니 보고 싶던 이가 기차에서 내렸다. 동매였다. 가슴이 철렁였지만 총을 내릴 수는 없었다.
‘무신회의 이야기는 없었는데?’
함정임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를, 자신을 발견해 알아보지 않기를 빌었다. 하지만 동매의 촉은 날카로웠다. 동매는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했고, 결국 총격전이 벌어졌다.
“탕- 탕-”
발만 묶어두는 계획이었기에 낭인들에게 위협사격만 가했다. 그러면서도 동매의 행동을 놓치진 않았다. 부하들의 난동에 화를 내던 동매가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뛰기 시작했다. 동매가 가는 방향 저 멀리에 ‘대한협동우선회사’의 간판이 보였다. 전화기를 노린다는 걸 알아챘다. 애신은 동매보다 빠르게 지붕을 타고 해당 회사의 근방에 도착을 해 조준경으로 전화기를 찾아봤다.
‘제발. 그대보다 빨리. 그대에게 총을 겨누고 싶지 않아.’
애신이 간발의 차로 전화기를 부수는 데에 성공했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동매가 애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날카로운 동매의 촉이 미워지는 순간이었다. 애신이 방금과 같이 빠르게 지붕을 타고 이동을 하며 낭인들의 시선을 빼앗았다. 애신의 뒤를 쫓던 동매가 하야시의 심복에게서 총을 빼앗아 지붕 위를 조준했다. 얼굴을 살피기 전에 총부터 쏘았어야 했는데, 얼굴부터 확인해버렸다. 그 자가 애신임을 알아채 버렸다. 심장과 함께 총구도 철렁였고, 당황함이 섞여버려 방아쇠를 당겨버렸다.
“탕-”
애신의 모습이 지붕 사이로 사라졌다. 동매는 들고 있던 총을 내팽겨지고 애신이 사라진 위치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
지붕 아래로 떨어져 흙먼지를 뒤집어 쓴 애신이 고통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애신의 근처는 애신의 다리에서 흘러나온 피로 붉게 물들었다. 뜀박질 소리가 가까이 다가오더니 쓰러진 애신에게 그림자를 드리웠다. 잡혔구나- 싶었는데, 그 그림자는 차갑기는커녕 따스했다.
애신은 동매임을 확인하고는 애써 웃어보였고, 동매는 이를 꽉 깨물었다. 애신의 환부를 확인한 뒤 제 옷을 찢어 임시로나마 지혈을 했다. 샘솟는 피로 인해서 동매의 손과 소매가 붉게 물들었고 동시에 동매의 눈매도 붉어졌다.
“오야붕!”
유죠가 동매를 쫓아 달려왔다. 상황을 단박에 이해를 했는지, 애들을 집합시켜둘지 물었다.
“...어.”
“오는 길에 이 여인의 일행을 봤습니다. 이쪽으로 보낼까요?”
“그래. 부탁한다.”
유죠가 왔던 길을 빠르게 되돌아갔다. 동매는 애신을 무릎에 뉘였다. 애신은 제 옷자락을 잡고 고통을 참다가 동매의 손을 꽈악 잡았다. 서로를 쳐다보는 눈에는 고통과 미안함이 섞여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함안댁과 행랑아범이 인력거를 끌며 뛰어왔고, 애신을 태웠다.
“절간. 근처에 제물포 절이 있소. 그짝으로 오이소.”
“이보게. 함안댁.”
“와예. 애기씨가 믿는 자이니께 지도 믿어야지요. 어짜겠소.”
“뒤따라가는 자가 없는지 확실히 확인하고 가겠습니다. 애기씨를 잘 부탁합니다.”
“걱정마소.”
동매가 먼저 길을 나서 주변을 살피고 신호를 보냈다. 애신을 태운 인력거가 저 멀리 사라지자 동매는 유죠 일행이 있는 곳으로 무겁디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
동매는 통금시간이 지나고도 한참 후에야 제물포 절에 도착했다. 절 한 켠에 불빛과 신음소리가 흘러나오는 방이 보였다. 그 쪽을 향해서 걸어다가다 주저앉아 양손으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밖에서 들려오는 수상한 인기척에 방 안에 있던 보살이 문을 살짝 열어 밖을 살폈다.
“에그머니. 웬 일본 놈이 와있어. 들켰나?”
“아. 괜찮습니더. 조선인이고, 믿을 수 있는 자입니더.”
애신에게 이 상처를 내기도 했고, 지켜주기도 한 자라고 말을 덧붙이려다가 말았다. 보살이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동매를 살피며 조심스레 밖으로 나갔다.
“애기씨요. 구동매가 왔다고 캅니더.”
“으응... 보고... 싶어... .”
진통제로도 막을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애신이 신음하듯 동매를 찾았다. 함안댁이 땀으로 얼룩진 애신의 얼굴을 한번 쓸고, 피로 붉게 물든 애신의 양장을 들고 방문을 열었다.
“보소. 애기씨가 그 짝을 찾소.”
함안댁의 부름에 동매가 고개를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로의 얼굴이 어두웠다. 함안댁이 조각조각이 나 버린 옷을 태워야겠다고 중얼거리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죄책감에 발목을 잡힌 동매는 우두커니 서서 열린 방문을 쳐다만 보고 있었다.
“구..동매.”
안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는 동매의 발목을 풀어주었고, 동매는 단숨에 애신에게 다가갔다. 애신은 벽에 기대어 고통을 참고 있었다. 동매가 애신의 근처에 무릎을 꿇었다.
“이리 오게.”
“애기씨. 저는... .”
“그대도... 아플 테지.”
눈을 반쯤 뜬 애신이 손짓을 했다. 부름에 못이긴 동매가 애신의 옆에, 같은 벽을 기대어 앉았다.
“옆에 있어주게. 아무... 말 말고.”
“예.”
동매와 애신의 손이 닿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애신이 색색대며 잠들었다. 동매는 애신의 땀을 닦아주고 애신의 손을 제 손위에 올려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
아침햇살이 방안에 들어왔다. 산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애신이 눈을 떴다. 동매의 손을 잡고 동매의 어깨에 기대어있었다. 애신이 놀라서 몸을 움직였다.
“아윽.”
다리를 타고 올라온 고통에 신음을 내뱉었다. 애신의 움직임과 신음에 동매도 눈을 떴다.
“아픈 건 좀 어떠십니까?”
“보다 괜찮네.”
동매는 아침인사보다 애신의 상태를 걱정했다. 애신이 여즉 잡고 있는 손을 들어보였다.
“덕분에 따뜻했고.”
“애기씨요! 일어나셨소?? 다리는 좀 괜찮으십니꺼?!”
인기척을 들은 함안댁이 문을 벌컥 열고 들어왔다. 동매가 애신과 잡고 있던 손을 빠르게 풀었다. 그리고 자리를 털고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행랑아범과 눈이 마주쳤고 어두커니 서서 기다리는 두 사람 사이에 어색한 기류가 흘렀다.
“걸을 수는 있겠습니꺼?”
“참을 만... 참아 보겠네.”
애신이 상복으로 환복을 하고, 다리를 절뚝이며 밖으로 나왔다. 신발을 신기 위해 몸을 낮추는데,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일그러지는 애신의 얼굴을 목격한 동매가 애신의 앞에 제 등을 숙였다.
“내려갈 때까지만 이라도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그게 좋겠네예. 애기씨 빨리 업히소.”
“아니-”
“기차시간에 늦겄구만요.”
세 사람의 성화에 못이긴 애신이 동매의 등에 업혔다. 동매의 어깨가 넓은 건 익히 보아 알고 있었지만, 직접 제 팔에 담아보니 새삼 넓었다. 동매는 최대한 조심히 한 걸음 한 걸음 신경 쓰며 걸음을 내딛었다. 계단을 내려갈 때에도 평지를 가볍게 흘러간다고 착각을 할 정도였다.
산을 내려가 보니 인력거 한 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인력거꾼이 동매에게 인사를 하는 걸 보니 동매가 불러둔 모양이었다. 동매가 애신을 인력거 안쪽에 내려주었고, 애신은 덕분에 땅에 발을 딛지 않은 채 인력거를 탈 수 있었다. 애신과 함안댁을 태운 인력거가 출발을 했고, 동매와 행랑아범은 그 뒤를 따라 걸었다. 동매가 행랑아범에게 무언가 건넸다.
“이게 뭔가?”
“기차푭니다.”
“기차표는 우리도 있소.”
“특등칸 입니다. 조금 더 편히 가시라고 사뒀습니다.”
행랑아범이 기차표를 받아들자 동매가 머쓱한지 발걸음을 빠르게 옮겨 인력거를 앞질러갔다. 앞질러간 김에 인력거가 무리 없이 지나가도록 길을 터주었다.
‘거참. 저 자가 원래 저랬나, 아니면 애기씨를 위해 변하는 건가.’
*
제물포역은 탑승 준비로 어수선했다. 어제의 총격전의 여파인 듯 일군 몇이 주변에 경계를 하고 있었다. 동매는 누가 보낸 일군인지 아는 눈치였다. 애신이 인력거에서 내려 아무렇지 않은 듯 기차를 향해 걸었다.
“먼저 타시지요.”
“그대는?”
“저는 상황을 좀 살피다 타겠습니다. 그리고 저는 일반칸 입니다.”
무어라 더 묻고 싶었지만, 함안댁이 재촉하는 바람에 먼저 탑승수속을 밟았다. 동매는 애신 일행이 무사히 기차에 타는 걸 보고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일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았다. 어제의 총격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제물포역을 서성거릴 의병이 있을 거라고 여길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하야시는 모든 가능성을 염려한 모양이었다. 하루에 두 번 뿐인 기차이니 일군들의 검문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매가 일부러 특등칸이 있는 기차칸으로 들어갔다. 일반칸으로 가는 길에 애신에게 검문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의를 할 예정이었다. 허나 함안댁과 행랑아범이 특등칸 통로에서 동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뭡니까?”
“우리가 저짝에 타고 갈 테니까 그 짝은 애기씨와 같이 타이소.”
“보니까 애기씨께서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 모양이오.”
함안댁과 행랑아범이 말을 전하고는 통로 너머로 사라졌다. 동매는 우두커니 서서 문을 두드릴까 말까 망설였다. 등 뒤에서 길을 막지 말라는 웅성거렸지만 동매에겐 들리지 않았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소란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챈 애신은 동매를 불렀다.
“들어오게.”
동매가 문을 벌컥 열고 소심하게 안으로 들어왔다. 애신이 눈짓을 하자 애신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긴 했으나 차마 애신을 쳐다볼 수 없어 고개만 푹 숙이고 있었다.
“인력거도 특등칸도 그대가 마련했다고 들었네.”
“이런 것 밖에 해드릴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닐세. 아니 굳이 따지자면 내 탓이지.”
“아닙니다.”
“나에겐 그대도 소중하고, 조선도 소중하네. 그대의 위치를 알기에 알릴 수가 없었네.”
“제겐 세상 그 무엇보다 애기씨가 소중합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
“...그러니, 부디. 제가, 다시는.”
동매가 벅차오르는 감정을, 목구멍 밖으로 뛰쳐나오려는 감정을 가까스로 막으며 말을 이었다.
“애기씨를 해치는 일이- 없었으면, 합니다.”
“... ... .”
제 앞에 앉은 사내의 몸이 떨렸다. 저보다 힘든 세상을 겪어왔으니 저보다 강하고 굳셀 줄 알았다. 허나 그 누구보다 여린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주게.”
“... ... .”
“나를 봐주게.”
“... ... .”
묵묵부답이었다.
“내가 그리로 가겠네.”
애신이 아직 피가 멎지도 않은 다리를 움직이려하니 동매가 바로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붉었다.
“아까처럼 내 손을 잡아주게.”
동매가 조심스레 손을 내미니 애신이 고개를 저었다. ‘아까처럼’ 동매가 애신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제서야 애신이 손을 내밀었다.
“아차. 이게 아니지.”
애신이 손을 더 뻗어 동매의 어깨를 감싸 안아 우는 아이를 달래듯 등을 토닥였다. 동매가 애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서로의 심장소리가 따스했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
“이제는 좀 괜찮소?”
애신의 말에 동매가 서둘러 눈시울을 훔치고 애신과의 간격을 벌렸다.
“애초부터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그리 말하면 내 가슴이 퍽 아프오.”
“아. 이젠 괜찮습니다. 애기씨 덕분에 괜찮아졌습니다.”
애신이 동매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동매도 애신을 따라 미소를 지었다. 그러던 도중 밖에서 소란스러운 인기척이 들려왔다. 동매가 검문에 대한 경고를 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문이 벌컥 열렸고, 동매가 빠르게 팔을 뻗어 애신 뒤쪽의 창문을 짚었다. 그 덕에 일본군에게 애신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뭐냐.”
“자, 잠시 검문이 있겠습니다.”
“그래서.”
“시, 실례했습니다!”
동매의 기에 눌린 일본군이 말을 더듬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일본어를 할 줄 모르나, 동매가 말 몇 마디로 일본군을 내쫓았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다른 이들에겐 제법 무서운 모양일세.”
“그게 무슨-”
동매가 애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애신이 양손으로 동매의 두 볼을 잡았다.
“내가 보기엔 이렇게나 여린데.”
동매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애신이 히죽거렸다.
“자꾸 그러시면 다시 자리를 옮기겠습니다.”
“아니!”
동매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애신이 동매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그러면 내가 그대의 옆으로 간대도.”
어쩔 수 없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애신이 동매의 소매를 놓고 동매의 손을 잡았다.
“그 일 왜 하시는 겁니까?”
“그 일? 의병을 말하는 겐가?”
“예.”
“그야 조선이니까. 이름 모를 옛사람들이 지켜온 조선일세. 이번에는 내가 지킬 차례일 뿐이고.”
“그럼 저는-
“조선이 그대에게 얼마나 차가웠는지 내가 알 수는 없네만, 짐작은 할 수 있네. 그렇기에 그대에게 강요할 생각은, 강요할 일은 추호도 없을 걸세. 내 약속함세.”
“...하지만 조선은 저에게 애기씨를 만나게 해주었습니다.”
“그런가.”
애신이 맞잡은 두 손에 힘을 주며 웃었다.
“음-. 한 가지 부탁이 있네.”
“말씀만 하시죠.”
“제빵소에 자네 이름으로 사탕을 사두겠네. 가끔 들려서 그 사탕을 받아 가주게. 가끔은 그 안에 서신을 넣어두겠네.”
“그럼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좋네.”
두 사람만의 작은 소통창고가 생겼다.
***
화월루/
동매가 지게꾼 대신 화월루의 주인을 하야시에게 넘겨 깔끔하게 화월루를 차지했다. 깨끗한 소식은 아니었지만, 좋은 소식인 건 변함이 없기에 애신에게 서신을 썼다.
[ 좋은 일이 생겨 이리 서신을 씁니다.
제가 진고개 화월루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구경을 시켜드릴까 하는데,
구미가 당기시면 술시(19~21)에 화월루 뒷문으로 오시지요. ]
서신을 들고 제빵소로 향했다. 제빵소 주인이 인사를 하고 동매의 눈치를 살폈다.
“내 이름으로 달린 게 있어?”
“예!!! 애신 애기씨께서-”
제빵소 주인이 두 손으로 사탕봉투를 건넸다. 받아 들어보니 제법 묵직했다. 애신이 준 사탕봉투는 옆구리에 끼고, 다른 봉투에 붉은 사탕을 쓸어 담았다. 마지막엔 고이 접은 서신을 넣어 봉투를 밀봉했다. 동전과 함께 전해주며 애기씨 이름으로 달아두라고 일렀다. 동매가 자리를 뜨자 제빵소 주인이 중얼거렸다.
“돈도 아니고 사탕을 달아두다니. 거 참 희한해.”
*
동매가 사탕을 먹으며 애신이 쓴 서신을 읽었다.
[ 약조대로 서신을 쓰오.
내 오늘 파혼을 다시 한 번 제안하러 빈관에 갔었소.
저번에 빈관에 나와 있던 사내가 그 정혼자요.
여하튼- 파혼은 얼버무려졌지만 그 자와의 동무는 확정지었소.
당구라고 동무들끼리 한다는 놀이를 했었소.
그러니 걱정마시오.
아, 그리고 그대가 보고 싶소. ]
전체적인 내용은 퍽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마지막 한 문장이 동매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즐거워하는 동매에게 유죠가 다가왔다.
“좋은 일이라도 있으신 모양입니다. 오야붕.”
“아. 마침 잘됐다. 오늘부터 며칠간 제일 큰 방에 손님 받지 마. 뒷문 쪽에 아무도 못 다니게 하고.”
“예.”
“그리고 이거 나눠먹던가.”
동매가 사탕을 넘겨줬다. 유죠가 괜찮냐고 재차 물었고, 동매는 이걸로도 충분하다며 서신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몇 발자국 갔을까 동매가 다시 유죠에게 다가왔다.
“몇 개만 더.”
동매가 사탕 두세 개를 입안에 우겨넣고 다시 돌아갔다. 술시까지는 한참 멀었지만, 달콤한 기다림의 시간이었다.
*
해가 지고 어둑어둑한 술시가 되자 동매가 뒷문에서 어슬렁거렸다. 매일 술시에 이렇게 기다릴 요량으로 서신에 날짜는 적지 않았었다. 기다리고 기다려도 애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직 다리가 성치 않아 움직이기 힘드실 거라고 위안을 삼으며 다른 날을 기약하려던 참에 양장을 한 자가 뒷문으로 걸어왔다.
“길을 잘못 들어오신 듯합니다. 나으리. 손님은 앞문으로 받-”
“앞문으로 가야하오?”
애신이었다. 동매가 반가운 마음에 애신을 와락 끌어안았다. 애신도 동매의 어깨를 끌어안으려다 저 멀리 길 끝에서 이상하게 쳐다보는 행인이 있었기에 동매를 떠밀었다.
“밖에서 이럴 거요?”
“아, 안으로 드시지요. 애기씨.”
제 입에서 나온 호칭과 애신의 복장에서 모순됨을 느꼈다.
“도련님이라고 불러드릴까요? 아니면 나으리라고 불러드릴까요?”
“나으리로 해주시오.”
“예. 나으리.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동매와 애신이 웃으며 화월루에 들어갔다. 방문 앞에 도착하자 술상을 차려두란 얘기를 잊은 게 생각났다. 아차-하며 방문을 열었는데, 화려한 술상이 차려져있었다. 양이 상당히 많았지만, 잔이나 수저의 수를 보면 딱 두 사람 몫의 술상이었다. 유죠에게 답례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화월루 구경이 아니라 일식 구경을 시켜주려고 했었소?”
“원하시면 화월루 구경도 시켜드리겠습니다.”
“...안의 사람들을 다 내쫓을 생각을 했지?”
“예.”
애신이 동매의 옆구리를 찌르고 자리에 앉았다. 동매가 옆구리를 문지르며 문을 닫았다. 엄살은- 애신이 웃으며 모자를 벗었다.
“그 모습으로 오실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자는 척을 하느라 좀 늦었소. 미안하오.”
“예까지 혼자 오신 겁니까? 돌아가실 생각은-”
“물론 혼자 조용히 나왔으니, 혼자 조용히 되돌아갈 예정이오!”
두 사람의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서로의 생각이 읽힌 듯 했다. 애신의 시선이 둘 곳을 찾다가 자연스레 술상 위의 화려한 음식에 꽂혔다. 전이나 김치 같은 익숙한 찬들도 보였으나, 튀김이나 형형색색의 나베 등은 처음 보는 음식이었다.
“술은 좀 하십니까?”
“아주 못 마시는 건 아니오. 큰어머님 옆에서 홀짝인 적이 많소.”
“그럼 술 말고 물로 채워드리겠습니다.”
“어허. 나를 얕보는 거요?”
“알겠습니다. 나으리. 제가 한잔 따르겠습니다.”
애신이 동매에게 술을 한잔 받았다. 저도 따라주려고 동매의 잔을 봤으나 동매의 잔은 이미 채워져 있었다.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동매가 잔을 내밀어줬기에 즐겁게 잔을 부딪쳤다. 애신은 동매를 쳐다보며 잔을 비웠는데, 동매는 고개를 돌려 잔을 비워냈다. 술 예절을 모르는 애신이 아니었기에 아직까지 저를 윗사람으로 대하는 동매에게 안타까움과 미안함을 느꼈다.
“따뜻한 술은 처음이오.”
“사케라고 일본인들은 따뜻하게 마시는 편입니다.”
“추운 날씨에 어울리는 술이로군.”
애신이 즐겁게 안주들을 맛보는 사이에 동매는 다시 제 잔을 채워 혼자 비워냈다. 즐거워하는 애신을 보니 술의 쓴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는 술이 모자를 느낌이 들었다.
“잠시 술을 더 가져오겠습니다.”
“알겠소.”
동매가 나가자마자 애신이 동매의 잔을 대신 비웠다. 약간씩 술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동매가 돌아오면 꼭 자기가 직접 술을 따라 주리라 다짐했다.
동매는 주방으로 가서 한 손에 술을 두 병씩 쥐어 들었다. 유죠가 그 모습을 보더니 궤짝을 건넸다. 제 주량이 주량인지라 이 정도는 끄떡없다는 생각에 술을 궤짝으로 들고 갔다. 다시 방에 돌아와 보니 애신이 진지한 표정으로 술병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뭐 하십니까?”
“빨리 잔을 드시오. 비어있던데, 내가 채워주겠소.”
“그럴 리가 없-”
그럴 리가 있었다. 분명 채워놓고 나갔던 잔이 비워져있었고, 애신이 실실 웃고 있었다. 동매가 머뭇거리다 잔 대신에 새 술병을 들었다.
“저는 째로 마시겠습니다.”
“아아-아!”
애신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동매는 고개를 돌려 병에 입을 가져다댔다. 동매가 그 자리에서 병을 비워내자 애신의 절규가 흐느낌으로 변했다. 놀란 동매가 상에 손을 짚어 몸을 들어 올렸다. 애신이 순간 고개를 들었다. 하마터면 크게 부딪힐 뻔 했다.
“나도 병으로!”
“더 드시면 혼자 조용히 돌아가실 수 없을 듯합니다. 나으리.”
“취하지 않았소. 들어보시오. 여기는 화월루고, 그대는 내 정인이오. 틀린 말 하나 없잖소?”
“취하지 않으셨군요.”
동매가 웃으면서 술병을 건넸다.
*
웃음소리는 더 커지고, 빈 술병이 늘어가고, 빈 사발도 늘어났다. 얼굴이 붉어진 애신이 조용히 빈 사발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빈 사발을 쥐고는 강하게 내던졌다. 놀란 동매가 널브러진 사발을 주워다가 애신의 옆에 앉았다.
“왜 그러십니까?”
“사발... 사발... 다 명중시켜야 돼.”
가마터에서 깨진 사발들을 사가던 목적을 알아챘다. 동매가 빈 사발에 다른 안주를 옮겨 담았다. 애신이 아쉬워하며 제 술병에 손을 뻗자 동매가 애신의 술병을 채갔다. 그리고 빠르게 비우고 빈 술병을 애신에게 쥐어줬다.
“술이- 없네?”
“예. 다 드셨습니다.”
“함안댁! 여기 술 좀 더 가져오게!!”
“함안댁은 여기 없습니다.”
“행랑아범은?”
“행랑아범도 없습니다.”
“동매는 있네?”
애신이 양손으로 동매의 양 볼을 잡고 웃었다. 동매는 입만 뻐끔거렸다. 애신이 무어라 중얼거리더니 그대로 포옥 동매의 품에 고꾸라졌다. 동매가 모든 움직임을 멈추고 얼굴만 붉혔다.
*
화월루의 영업시간이 끝났다. 유죠는 손님들을 다 내보내고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게이샤 하나가 큰방은 그냥 둬도 괜찮은지 물었다. 아차-싶어서 게이샤 대신 큰방으로 향했다. 불빛은 새어나오는데, 잔을 부딪치는 소리나 말소리는 하나도 새어나오지 않아 이상하게 여겼다.
“오야붕?”
작게 동매를 불러보았으나 답은 없었다. 조심스레 문을 열어 안쪽 상황을 확인했다. 바닥엔 술병 몇 개가 굴러다녔고, 그 술병들 사이로 곤히 잠이든 동매와 변복을 하고 잠든 애신을 보았다. 곧바로 문을 닫고는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동매든 애신이든 곤란하지 않게 하기 위해 망을 보는 유죠였다.
시간이 흘러 하늘이 약간 밝아지자 애신이 눈을 떴다. 눈앞에는 동매의 얼굴이, 제 손은 탄탄한 동매의 가슴팍에, 동매의 팔은 제 몸을 감싸고 있었다. 애신이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곤히 자던 동매도, 밖에서 망을 보며 졸던 유죠도 눈을 떴다.
“일어났으면 팔 좀 풀어주시오.”
“아. 예. 송구합니다. 애기씨.”
얼굴이 붉어졌다. 간격을 벌려 앉아 멋쩍게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취해서 잠든 지도 몰랐소.”
“취한지도 모르셨었습니다.”
“내가?”
“어제 빈 사발을 집어 던지셨는데, 생각 안 나십니까?”
“내가???”
애신이 이마를 짚고 기억을 더듬었다. 뜨문뜨문 기억이 났다. 동매가 무릎으로 걸어서 애신의 곁으로 다가왔다.
“기억나십니까?”
“머리가 아파서.”
“숙취에 좋은 약이 있으니 챙겨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기억은 나셨습니까?”
“빨리 돌아가야겠소. 까딱하다간 들키겠소.”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기억은-”
애신이 동매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애신의 손 틈 사이로 동매의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애신이 노려보자 동매가 애신의 손바닥에 달콤하게 입을 맞췄다. 놀란 애신이 손을 떼고 얼굴을 붉혔다. 동매가 능글맞은 표정으로 애신을 쳐다봤다. 동매의 등을 팡팡 치다가 등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가봐야겠소. 약방에서 옷을 갈아입을 시간도 필요하고.”
“다리는 괜찮으십니까?”
“누가 신경을 써준 덕에 거의 다 나았소.”
“별말씀을.”
“함안댁이.”
“... ... .”
동매가 말없이 무릎을 툭툭 털고 일어나서 그대로 문 앞으로 걸어갔다. 애신이 뒤따라가며 삐졌냐고 쿡쿡 찌르며 웃어댔다. 문을 여니 유죠가 대기를 하고 있었다.
“다 돌려보내놨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아아. 그래.”
“그리고 이것도.”
“가끔 보면 무섭네.”
유죠에게 숙취해소 약을 건네받았다. 애신이 고맙다고 하자 유죠가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화월루 밖으로 나가 하늘을 보니 아직 통금시간인 듯 했다.
“지금 길에 나서도 괜찮은 거요?”
“진고개에는 순찰을 돌지 않는 편이라 괜찮습니다.”
“그럼 진고개를 벗어나면?”
“뛰어야지요.”
“흠.”
“제가 엎고 뛸 테니 다리 걱정은 안하셔도 됩니다.”
“대문 안까지 함께 갈 생각이오?”
“담장까지요.”
“내가 담장을 넘었다는 건 어찌 알았소?”
실없지만 소소하게 행복한 담소를 나누며 길을 걸었다. 가는 도중에 순찰을 도는 조선군에게 들켜서 남의 집 담장 뒤에서 숨죽이며 숨기도 했고, 애신이 담장을 수월하게 넘을 수 있게끔 동매가 발판을 자처하기도 했다.
***
얼어붙은 강/
겨울이 찾아와 밖을 다니는 사람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애신이 학당에 가는 길에 제빵소에 들렀다. 예상대로 동매가 애신의 이름으로 달아둔 사탕이 있었다. 빈 봉투에 사탕과 서신을 접어 넣고 제빵소 주인에게 넘겼다. 이제 제빵소 주인도 익숙한 듯 보였다.
*
제빵소를 스쳐지나가려는데, 제빵소 주인이 큰 소리로 인사를 했다. 애신의 이름으로 사탕을 달아둔 게 오늘 아침이었는데, 애신이 그새 다녀간 모양이었다. 받아든 사탕봉투 안에는 서신도 들어있었고, 동매는 그 자리에서 서신을 읽어 내려갔다.
[ 학당에 가는 길에 들르오.
가마터에 한 번 가야겠는데, 그대와 가고 싶소.
가능한 시간을 적어 답신 주시오.
날이 추우니 고뿔에 걸리지 않게 따뜻하게 다니시오. ]
동매가 사탕을 입안에 털어 넣고, 애신의 서신을 고이접어 품속에 넣고 학당 방향으로 뛰었다. 한걸음 한걸음이 달콤했다.
“오야붕이 저리 뛰어가시는데, 저희는 여기 이러고 있어도 됩니까?”
“가봤자 우리는 필요가 없다. 화월루로 간다.”
“예.”
유죠가 동매를 대신해서 남은 이들을 통솔했다.
*
수업이 끝나 돌아갈 준비를 하는데, 학우 몇몇이 소란을 떨었다.
“무슨 일이 있는 게요?”
“애기씨께서도 뒷문으로 나가시는 게 좋을 듯싶습니다. 칼을 찬 낭인 하나가 문 앞에 있댑니다.”
“어우. 무서워라.”
“내가 그 자를 물릴 테니, 걱정 마시오.”
“아니. 괜찮으시겠어요?”
애신이 우려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함안댁과 함께 정문으로 나섰다. 역시나 동매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은 반가워했지만, 애신의 발걸음은 동매를 스쳐 저 멀리 걸어갔다. 당황한 동매가 허둥지둥 애신의 뒤를 따랐다.
“그대 때문에 정문을 못 쓰겠다고 안이 난리인 건 아시오?”
“생각을 못했습니다. 죄송합니다. 그저 빨리 보고 싶은 마음에... .”
“나도 보고 싶었소. 그런데, 무슨 일이오?”
“답신을 해드리려 이리 왔습니다.”
“지금이오?”
“예.”
동매와 애신이 발을 맞춰 함께 걸어갔다. 주변 행인들의 시선을 끌면 어쩌나 싶었지만, 추위 탓에 다들 제 갈 길만 보고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나루터에 도착하니 함안댁에 지는 안갑니더- 라고 외치고 주막 안으로 쏙 들어갔다.
“강이 얼어 노꾼이 필요 없어 보입니다.”
“노꾼은 필요가 없으나 그대는 필요하오.”
“노꾼 말고 짐꾼으로 하겠습니다.”
“그러시오.”
동매와 애신이 함께 얼어붙은 강 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게다로 얼음 위를 걷기는 무리인지 동매가 계속 휘청거렸다. 애신이 손을 내밀어줬고 동매가 멋쩍어하며 손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애기씨.”
“흠.”
“왜 그러십니까?”
“그대는 언제까지 나를 애기씨라고 부를 거요?”
애신은 가볍게 물었지만, 동매는 가슴이 쿵하고 떨어졌다. 동매가 걸음을 멈추고, 손에 힘을 풀었다. 허나 애신은 여전히 꼭 잡고 있어서 손이 풀리진 않았다.
“애기씨께서는...”
애신은 양반이고, 저는 천한 백정 출신임을 아는 동매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곤란하게 해서 미안하오.”
“... ... .”
“하나만 알아주길 바라오. 나는 그대도 조선도 소중히 여기오. 그리고 그 안에는 신분에 따른 차이가 없소.”
“... ... .”
“십여 년 전에 어느 소년이 내게 가르쳐줬소.”
“저는 그 때만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집니다. 아프지.. 않으셨습니까?”
“아팠소.”
애신이 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허나 그대가 더 아팠던 모양이오.”
푹 숙여진 동매의 고개를 제 가슴에 품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동매에게 덧없는 위로가 되고 용기가 되었다.
“사내인줄 알았는데, 아직 어린 아이인가 보오.”
애신이 파하하 웃었다. 동매가 고개를 들고 애신의 어깨를 잡았다. 애신을 쳐다보며 미간을 살짝 좁히더니 그대로 애신을 들어 어깨에 걸쳤다.
“으악! 이게 무슨-”
“어린 아이는 이런 짓 못합니다.”
동매가 애신을 들쳐 맨 채로 가마터를 향해 뛰기 시작했다. 드넓은 강 위에 애신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
움막/
일전에 동매와 가마터에 가서 사온 사발을 들고 장승구의 움막으로 향했다. 환복을 하고 연습을 하려하니 장승구가 애신을 불러 세웠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홍파에게 진고개의 구동매와 자주 만난다는 얘기를 들었다. 정확히 하자면 목격담이지.”
“예. 더 자주 만나지 못해서 아쉽지요.”
“어허!”
야단을 맞았다. 장승구가 이러는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동매의 출신 혹은 동매의 소속.
“백정 출신이라 그러십니까? 아니면 무신회 사람이라 그러십니까?”
“둘 다다. 제물포에서의 일도 다 들었다. 더 큰 일이 벌어지기 전에 그 자와의 연을 끊어라.”
“싫습니다. 그렇게는 못합니다.”
“못 해?”
“그의 출신 때문에 아팠지만, 덕분에 성장했습니다. 또 그 때문에 다쳤지만, 덕분에 무사했습니다.”
“무신회가 어디에 충성을 하는지는 알고 하는 말이냐?”
“알지요. 잘 압니다.”
애신의 눈에 눈물이 맺혔다. 장승구가 머리를 짚으며 근처 바위에 앉았다. 애신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걸 잘 알기에 더더욱 머리가 아팠다.
“지금은 괜찮을지 몰라도 후에 그 때문에 피눈물을 흘릴 게다.”
“예. 그것도 잘 압니다.”
애신이 고개를 돌려 두 눈을 꼭 감았다. 맺혀있던 눈물이 또르륵 흘러내렸다.
***
빚/
장승구와의 대화 탓인지 요즘 들어 동매와의 만남을 더더욱 조심스레 하고 있었다. 동매도 눈치를 채고 일부러 애신과의 만남을 피했다. 그렇게 만나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고, 제빵소를 통해 간간히 서신만 주고받는 상태였다.
어느 상점에 들러 물건을 사던 중에 유리문 너머로 동매를 목격했다. 그리고 어느 소녀가 도움을 청해왔다. 일단 문을 열었는데, 차마 말도 발도 떨어지지 않았다. 분명 저의 동매인데, 저의 동매가 아닌 상황이었다. 동매가 다 이해한다는 듯, 괜찮다는 듯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이리 어린 아이에게 거칠게 대하는 건가.”
“제게 손해를 끼치면 애고 어른이고 그냥 두질 않아서요. 게다가 아무도 나서지 않는데, 끼어드실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나는 도움을 청하는 이가 애든 어른이든 상관없이 손을 내밀어서 말일세.”
“살려주세요. 애기씨!”
수미가 애신을 부르며 낭인 곁에서 도망쳐왔고, 동매가 수미의 머리채를 잡아끌었다. 수미가 신음을 내며 괴로워하자 애신이 손을 올렸다.
“짝-”
애신이 동매의 뺨을 치는 소리가 거리에 울려 퍼졌다. 주변의 행인들도, 애신 본인조차 놀라 정적이 흘렀다. 이 상황에서 제일 태연하게 정적을 깨는 건 동매였다.
“손은 이리 내미셨으니 이제 이 아이 덕분에 잃은 돈을 갚아주셔야겠습니다.”
“...얼마인가.”
애신이 떨리는 손과 목소리를 숨기며 겨우겨우 말을 꺼냈다. 동매는 내달 보름에 찾아오라며 상황을 정리하고 수미와 애신을 두고 자리를 떴다. 낭인들이 저 멀리 사라지자 수미가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애신이 씁쓸하게 괜찮다며 웃음을 지었다.
동매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애신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었다. 애신이 수미를 먼저 돌려보내고 어디론가 자리를 옮겼다. 애신이 사라지고 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괜찮으실까... ... .”
“예?”
“그럴 리가 없겠지. 니들은 따라오지 마.”
동매가 무작정 내달렸다. 달려가며 애신이 혼자 있을 수 있는 장소를 생각했다. 약방이 떠올랐다.
*
혼자 있고 싶다며 함안댁을 먼저 집으로 돌려보냈다. 약방 한편에 쪼그리고 앉았다. 분명 소중히 여긴다고 했는데, 소중히 여기는데 그럴 수 없는 아까의 상황이 너무나도 괴로웠다. 움막에서 장승구와 나눈 대화가 떠올라 더더욱 괴로웠다. 저의 위치와 동매의 위치를 알기에. 두 눈에 눈물이 맺혔는데, 누군가 약방으로 들어왔다. 눈물이 눈앞을 가려 누구인지 확인할 수가 없었다. 알 수 없는 자는 애신에게 다가와 애신을 따스하게 끌어안았다. 거칠지만 따스한 품속에서 울음이 터졌다.
시간이 흘러 울음소리 대신에 훌쩍이는 소리가 약방을 채우기 시작했다.
“이제 다 우셨습니까?”
“...그대는?”
“저는-”
애신이 소매로 동매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누가 누굴 위로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그대를. 또 그대가 나를.”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그보다 더한 상황도 각오한지 오랩니다.”
“나는 아니었던 모양이오.”
“그럴 일이 없도록 제가 노력하겠습니다.”
“나도 그러겠소.”
지켜질 수 없는 약조라는 걸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그래도 내달 보름에 저를 찾아오실 일이 생기셨습니다.”
“매달 보름에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게 찾아가겠소.”
“내달이 아니라 매달이요?”
“좋은 핑계가 생긴 거요.”
“예.”
말없이 서로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
제물포절/
간만에 제빵소 주인이 동매를 불러 세웠다. 애신의 집 근처를 맴돌던 사내 때문에 반가움보단 걱정이 앞섰다. 다행히도 서신에는 걱정스러운 내용은 없었다. 만나고 싶다는 내용이었는데, 장소가 조금 의외였다.
*
이른 새벽, 동매가 제물포절 입구에서 애신을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상복을 입은 애신이 일행과 함께 나타났다. 애신의 얼굴에는 반가움과 어두움이 섞여있었다.
“자네들은 여기서 기다려주게.”
“예. 애기씨.”
애신이 동매에게 손을 내밀었고, 동매는 애신의 손을 잡았다.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이 멀리 있는 절에서 보시자고 하니 놀랐습니다.”
“그대에게 인사시켜드리고 싶은 분들이 계시오.”
상복과 절, 그리고 애신의 말로 인해서 애신의 목적을 알아챘다. 전에도 애신은 여기 제물포 절에서 상복을 입었었다. 이제야 알아차린 제 자신이 너무나도 등신 같았다.
“제가 감히 뵈어도 괜찮을까요?”
“그럼. 물론이오. 예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잊었었소.”
“옷도 옷이고, 뵐 낯이 없습니다.”
“걱정 마시오.. 내 정인이니 다 이해해 주실 테고, 반가워하실 게요. 그리고 지금 말고는-”
“... ... .”
“지금이 딱 그대를 보여드릴 적기라고 생각했소.”
애신이 침착하게 말을 고치며 먼저 절 안으로 들어갔다. 동매가 조용히 애신의 뒤를 따라 들어갔다.
*
“아, 칼이라도 밖에 두고 가겠습니다.”
“그냥 오시오. 있는 그대로의 그대를 보여드리고 싶소.”
애신의 만류에 동매는 어쩔 수 없이 칼을 찬 채로 전에 들었다. 애신이 부모님의 위패 앞으로 다가가자 동매는 그보다 조금 뒤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애신이 부모님의 위패 앞에 향을 피웠다. 향이 붉게 빛나자 애신이 동매의 옆으로 다가가서 함께 무릎을 꿇었다.
“어머님, 아버님. 지난번에 인사도 없이 돌아가서 죄송했습니다. 항상 그렇듯 저는 건강히 잘 있습니다. 작년과 다른 점이 있다면, 조선을 지키는 데에 손을 얹기 시작했다는 것과-”
애신이 동매의 손등 위에 제 손을 올렸다. 동매가 애신을 쳐다봤고, 애신은 눈웃음을 지었다.
“정인을 만났다는 게 있지요. 조선과 일본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아 항상 혼자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더더욱 곁에 있으면서 손을 잡아주려고 합니다. 위에서 좋게 봐주시고 격려해주셔요.”
분명 애신의 부모님께 드리는 말씀인데, 동매에게 크나큰 위로가, 용기가 되었다. 동매가 손을 뒤집어서 애신의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저도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편하게 하시오.”
“이렇게 뵐 줄 몰라서 차림이 이렇습니다. 이놈 칼을 씁니다. 10살 때부터 칼을 잡아왔습니다... ... . 그 나이에 처음으로 벤 이가 애기씨였습니다. 많이... 아프셨겠지요. 헌데 괜찮다-... 괜찮다- 하시면서 제 손을 이리 잡아주십니다. 그래서... ... .
동매의 목이 메여왔다. 속에 담아만 놓고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들이, 감정들이 터져 나왔다.
“칼을 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게 없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애기씨를 위해서만, 지키기 위해서만 칼을 뽑으려합니다... ... . 제 업보를 아니 좋게 봐달라고, 허락해달라고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그저 나쁜 말만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 .”
어두웠던 하늘 사이로 햇빛이 고개를 내밀었다. 어두컴컴해서 향의 불빛만 빛나던 절 안쪽에도 햇빛이 드리웠다. 그 햇빛이 천천히 팔을 벌려 두 사람을 감싸 안았다. 애신이 가자는 듯 쥐고 있는 손을 가볍게 흔들었다. 밖을 나설 때에도 계단에 발을 딛을 때에도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고맙소.”
“예?”
“내 손을 놓지 않아주어 고맙소. 그리고-”
“... ... .”
“나도. 나도 그대를 지켜주겠소.”
“감사합니다. 애기씨.”
나무 위에 앉아있던 눈들이 바람을 타고 흩날렸다.
***
보름/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 찾아왔다. 너무 들떠서 잠도 자는 둥 마는 둥 하고 이른 시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성지부의 어디로 모셔야 할까 고민하다가 방을 쓸고 닦기 시작했다. 저의 사람들을 시킬 수도 있었지만 직접, 정성스레 구석구석을 청소했다. 다 끝내고 콧노래를 부르며 밖으로 나오니 유죠가 아침인사를 했다.
“건물 청소를 시킬까요?”
보름의 약조를 하던 순간에 유죠도 곁에 있었다는 걸 깜빡 잊었었다. 유죠의 제안에 살짝 흔들렸다.
“청소는 됐고, 도장에 모아놔. 대련 일찍 끝내고 목욕이나 하련다.”
“예. 오야붕.”
*
오늘따라 동매의 몸놀림은 가벼웠고, 그 덕에 동매의 낭인들은 더더욱 죽어갔다. 대련을 이어가는데, 도장 문 근처가 소란스러웠다. 마저 엎어 치고, 도복을 풀어헤치며 소란스러운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뭐냐?”
어두운 유카타와 흰 도복들 사이에 고운 치맛자락이 숨어있었다. 동매가 황급히 도복을 다시 입었다. 동매의 신호에 유죠가 애들을 이끌고 도장 밖으로 나갔다.
“이리 일찍 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꼴이 말이 아닌데.”
“일찍 오면 그대를 더 오래 볼 수 있을 듯하여. 그리고 구경도 잘 했소.”
“감상평을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음- 제일 멋진 사내에게 내 시선을 빼앗겼소.”
애신의 칭찬에 동매의 광대가 높이 치솟았다.
“헌데, 그대가 다른 이들이 약한 거요? 아니면 내가 온다고 미리 언질을 해서 약한 척을 해주던 거요?”
“너무하십니다. 저희는 강한 자만 따릅니다. 그리고 제가 이 녀석들 오야붕입니다.”
“물론 농이오. 진담으로 받아들였소?”
애신이 환하게 웃었다. 동매의 광대는 여전히 높았다.
“여기로 찾아오시는 길은 평탄하셨습니까?”
“걱정과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소. 내가 그대에게 잡혀버렸다고 소문이 파다하오.”
“헛소문이군요.”
“그러게 말이오. 잡힌 쪽을 고르라면 그대인데.”
애신의 말이 끝나자마자 동매가 애신의 손을 덥석 잡았다.
“알겠소. 우리 둘 다 서로를 잡았지.”
***
동매/
“탕-”
저의 수족 하나가 잘려나갔다. 두려움에 떨기는커녕 오히려 지켜준답시고 범인을 자처하며 동매를 겨냥한 총구 앞으로 모여들었다. 화도 나면서 뿌듯하기도 했다. 허나 이러면 사상자만 더 나올 뿐이었다.
“나 없는 동안 애들 잘 부탁한다. 그리고 애기씨나 애기씨쪽 사람들이 찾아와도 별일 아닌 척 해.”
이렇게 잡혀가는 걸 애신이 아예 모르면 더욱 좋았겠지만, 분명 진고개뿐만 아니라 한성 전체에 퍼질게 뻔했다. 저의 앞날보다 애신의 상태가 더 걱정되었다. 부디 아프지 않길 바랐다.
*
학당이 끝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 이름으로 달린 사탕을 받으려 제빵소에 들렸는데, 제빵소 주인이 어두운 표정으로 조심스레 애신을 불렀다.
“저... ... . 애기씨.”
“무슨 일 있소?”
“못 들으셨습니까? 오야붕께서 일본군에게 잡혀갔다고 저잣거리에 이야기가 파다합니다요.”
“누가... 어디에... 잡혀가?”
애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내 눈과 손에 이어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조선과 일본 그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다는 건 조선과 일본 모두 동매의 적이라는 이야기와 같았다. 허나 강한 사내이기에 괜찮을 거라고 너무 안일하게 생각한 애신이 받은 충격은 너무나도 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제빵소 앞에 풀석 내려앉았다. 근처에서 애신을 기다리던 함안댁과 저 멀리서 애신을 바라보던 희성이 달려왔다.
“애기씨요! 무슨 일입니꺼?”
“무슨 일이오?”
함안댁은 애신을 부축했고, 희성은 애신의 상태를 확인했다. 애신이 이렇게나 정신을 놓을 이유는 단 하나였다.
“아주 태연하게, 걱정할 필요 하나 없다는 듯 가는걸 보았소. 멀쩡하게 나올 테니 걱정 마시오.”
“아... 아니. 잠시... ... .”
애신이 함안댁의 부축을 받아 가마에 올랐다. 충격을 받은 표정에는 변함이 없었다. 조선인도 일본인도 아닌 자의 도움이 필요했다.
*
애신이 장승구를 집으로 불렀다. 함안댁의 도움을 받아 부엌에서 은밀하게 만났다.
“저를 한 번만 도와주셔야겠습니다.”
“뭘 어찌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자를 만나는 건 불가능하다.”
“예. 잘 압니다.”
애신이 이를 꽉 물고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담아 답했다.
“누구에게 갈 생각이냐?”
*
애신이 약방에서 변복을 하고 빈관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가니 애신을 알아본 히나가 여급을 부엌으로 보냈다.
“그 모습으로 빈관엔 어쩐 일이신가요?”
“검은 머리의 미국인을 만나러 왔소.”
“따라오시지요.”
“안내를 해주는 거요?”
“이리 멋진 신사분을 홀로 보내기엔 제 마음이 편치 않아서요. 그리고 저도 뜻이 같습니다.”
동매를 구하고 싶은 마음은 애신도 히나도 똑같았다. 히나를 따라 계단을 오르려는 순간 위쪽에서 총성이 들렸다. 연달아 들리는 총성에 몸을 낮추다가 뒤를 돌아본 히나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함께 3층으로 뛰어갔다. 3층 복도에서 유진과 마주쳤다.
“무슨 일인가요? 총성이 들리던데.”
“누군가 나를 저격했소. 지금 그 자를 쫓으러-”
히나의 뒤로 변복을 한 애신의 모습이 보였다.
“구동매는 무사하오.”
유진이 말을 끝내곤 옥상으로 달려갔다. 유진의 말에 애신은 다시금 다리에 힘이 풀렸다. 계단의 난간에 기대어 겨우겨우 섰다. 동매가 무사하다는데 여기서 무너질 수 없었다.
“마음이 좀 놓이네요. 그럼 안내 대신 배웅을 해드려야겠습니다. 제가 시선을 끌 테니, 뒷문으로 가시지요.”
“고맙소.”
*
애신이 히나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뒷문에 도착했다. 작게나마 감사의 인사를 하고 싶어서 뒤를 돌아 히나의 모습을 찾는데, 수상한 사내가 히나의 뒤를 쫓았다. 그 사내와 히나의 사이에서 총구를 목격했다. 히나가 위험에 빠진 게 분명했다.
히나가 문을 열고 펜싱 칼이 있는 방에 들어왔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천천히 들렸다. 분명 뒤를 따라온 자가 있고, 누구인지 예상이 됐다. 칼을 집어 하야시의 심복에게서 총을 떨어뜨렸다. 떨어진 총을 뒤쪽으로 보내니 예상대로 애신이 총을 집어 들었다.
“죽이진 마세요. 이자를 단단히 벼르는 이가 있어서.”
총을 들고 히나를 협박하던 일본인, 그리고 이 일본인을 단단히 벼르는 자. 동매가 떠올랐다. 방아쇠를 당겨버리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지만, 화병으로 머리를 내려침으로 대신했다.
“죽이실 줄 알았습니다.”
“양보하는 거요.”
“제 뜻도 같습니다.”
“이제 이 자를 묶어두면 되는 것이오?”
“양보가 아니라 선물을 하실 모양입니다. 제가 처리할 테니 이제 정말 뒷문으로 나가시지요.”
“알겠소. 정말 고마웠소.”
*
첫날은 죽는 게 더 나을법한 고통 속에서 애신을 생각하며 버텼다. 둘째 날은 저를 걱정할 애신을 걱정하며 버텼다. 미공사관을 나오니 제 발은 저절로 애신에게 향했다. 옷은 찢길 대로 찢기고, 온 몸은 피로 얼룩졌으니 동매의 앞길을 막는 자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 덕에 애신에게로 향하는 길은 편했다. 후에 어떤 소문이 저잣거리에 퍼질지 걱정이 되긴 했지만, 그보다 더 애신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컸다.
동매가 겨우겨우 몸을 이끌어 애신네 대문을 넘었다. 동매에 대한 걱정으로 방안에서 끙끙 앓던 애신은 식솔들의 소란에 방문을 열었다. 식솔들 사이로 동매의 모습이 보였고, 버선발로 뛰쳐나갔다. 동매가 애신에게 안기듯 쓰러졌고, 애신은 동매를 안 듯 받쳐줬다. 동매의 무사함을, 동매의 심장소리를 확인하자 애신의 두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함안댁이 놀라는 식솔들을 해산시켰다. 어른들에게는 꼭 함구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그리곤 행랑아범에게 동매의 낭인들을 불러오라고 시켰다.
“대감마님도, 마님도 외출 중이시라 다행이네예. 아범이 이 자의 사람들을 불러올 테니께 이제는 정말 괜찮을 껍니더.”
이렇게 피 칠갑이 된 채로 애신을 찾아온 동매도, 애신의 눈에서 흐르는 눈물도, 세게 잡으면 아플까 싶어서 동매의 몸에 살짝 가져다 댄 애신의 손도 너무나도 딱해보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낭인들이 달려왔고, 그 뒤에 행랑아범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돌아왔다. 동매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애신을 뜯어 말리는 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낭인들의 뒤를 쫓아가겠다는 걸 이따 밤에 어른들도 식솔들도 모르게 가라며 겨우겨우 애신을 진정시켰다.
*
날이 어두워지자 고사홍이 돌아와 애신의 상태를 물었다.
“애신이는 어떤가?”
“예에. 어제도 그제도 잠을 통 못 주무시다가 아까 겨우 잠드셨구만요.”
“갑자기 무슨 일인지 원... . 날이 밝거든 약이나 지어주게.”
“예. 대감마님.”
애신이 이틀간 잠을 못잔 건 사실이지만, 방에서 자는 건 거짓이었다. 애신은 이미 약방에서 환복을 하고 동매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한성지부 건물 앞에는 애신이 올 걸 예상한 유죠가 서 있었다.
“오야붕은 위층에 계십니다. 가시는 길을 터놓았으니 바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알겠네.”
유죠가 애신을 동매가 있는 방으로 안내했다. 자고 있는 동매의 곁에 기모노를 입은 한 여인이 앉아있었다. 그 여인은 두 눈에 눈물과 분노를 가득 채운 채 애신을 노려봤다. 두 주먹을 꽈악 쥐더니 일부러 애신의 어깨를 치며 방 밖으로 나갔다.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네. 오히려 내가 사과를 해야 될 느낌이라.”
“내일 정오까지 사람을 들이지 않을 테니 편히 계시다 가시면 됩니다.”
유죠가 인사를 하고 자리를 비켜줬다. 문이 닫히자 애신이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동매에게 뛰어갔다. 애신의 발소리와 손에 느껴지는 따스함에 동매가 눈을 떴다.
“애기씨?”
“...맞소... . 나요.”
“이 정도 상처는 금방 낫습니다. 이 정도 고통에 익숙하기도 하고.”
최대한 괜찮은 척을 하고 싶었는데,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잠을 통 자질 못해 눈 밑은 어두웠고, 반가움과 안타까움과 슬픔으로 인해 눈물이 가득 찼고, 벅차오르는 감정에 목소리와 손은 한없이 떨렸다.
“저보다 아프신 모양입니다.”
“그렇소. 아파서... 너무 아파서 죽을 것 같소.”
“이러지 않으시길 바랐습니다.”
“그러는 자가... 이리... .”
애신이 말을 잇는 대신에 동매의 손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다른 손으로는 눈물을 훔쳤다.
“몸을 일으켜 안아드리고 싶은데-”
“화낼 거요.”
“예.”
애신이 동매의 옆에, 동매를 바라보며 누웠다. 동매도 애신과 마주보며 눕고 싶었지만 애신의 만류에 고개만 돌렸다. 며칠간 쌓인 피로와 한 아름 들고 있던 걱정이 사라진 두 사람은 곧바로 잠에 빠졌다. 잡고 있는 손은 놓지 않았다.
*
애신도 동매도 간만에 깊고 행복한 잠을 잤다. 따사로운 햇빛이 눈꺼풀을 쓸어주어 눈이 떠졌고, 눈앞에는 햇빛보다 따뜻한 사람이 저를 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쳐 실실 웃음이 났다. 이렇게 행복한 아침은 애신에게도 동매에게도 처음이었다.
“어디 불편하진 않으셨습니까?”
“세상모르게 잠들었소. 그대는 좀 어떻소?”
“어제보단-”
동매가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폈다. 애신이 혹여나 상처가 터질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괜찮습니다.”
애신이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동매가 애신의 눈치를 흘깃흘깃 보면서 얼굴을 긁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보였다.
“뭐든 해줄 테니 말만 하시오.”
“그런 건 아닙니다. 아니. 그런 거긴 합니다만... ... .”
“뭔데 그러시오?”
“어제 해드리지 못한 걸 이제는 해드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어제?”
동매의 얼굴과 귀가 붉어졌다. 애신이 잠시 어제의 기억을 더듬더니 환하게 웃으며 두 팔을 활짝 벌렸다.
“애기씨께서 해주시려는 겁니까?”
“깐깐하기는.”
애신이 벌렸던 팔을 앞으로 쭉 뻗으며 동매의 품에 몸을 날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바람에 동매가 뒤로 넘어갔고, 그 위를 애신이 덮은 모양이 되었다. 동매가 낮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애신이 놀라서 몸을 일으키려는데, 동매가 애신의 등을 껴안았다.
“아프지 않으시오?”
“애기씨는요?”
“나야 뭐. 괜찮소.”
“그럼 저도 괜찮습니다.”
“정말?”
애신이 웃으면서 동매를 강하게 껴안았다. 동매가 신음소리를 내었지만 이내 웃음소리로 바뀌었다.
*
동매가 애신을 배웅해주기 위해 함께 1층으로 내려갔다. 집 앞까지, 진고개까지, 건물 밖까지 함께 가겠다는 걸 겨우겨우 말렸다.
“몸도 성치 않은 사람이 어딜. 얌전히 다 나을 때까지 건물 밖으로 나오지 마시오.”
“예... .”
“옳지.”
애신이 주변에 동매의 사람들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을 하고 동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시무룩하던 동매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정말 혼자서 괜찮으시겠습니까? 뭣하면 제 애들이라도 붙여드리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소. 함안댁과 행랑아범이 밖에서 기다릴 거요.”
“언제 불러두셨습니까?”
“그건 아니오. 그러지 않을까 싶은 거지.”
“믿으시나 봅니다.”
“물론이오. 나를 키워준 사람들이니.”
“다음에 뭐라도 대접해야겠습니다.”
“하하하.”
동매가 애신의 당부대로 문틀까지만 나가서 애신을 배웅했다. 건물 밖에는 애신의 예상대로 함안댁과 행랑아범이 애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
무신회 한성지부2/
며칠째 한성지부 내에서만 생활을 하고 있었다. 진고개라도 거닐어볼까 싶어 문을 넘으려 했었으나, 애신의 당부가 머릿속을 맴돌아 나갈 수 없었다. 그 덕에 제빵소도 들리지 못했다. 퍽 아쉬웠지만 슬슬 상처들이 다 아물어가서 조금만 더 버티기로 했다.
사탕을 사올까 묻는 유죠에게 무어라 쏘아붙이고 방으로 올라갔다. 문틈 사이로 냉기가 느껴졌다.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니 인기척이 거의 없었다. 단신 혹은 몇 안 되는 자들이 방에 침입한 게 분명했다. 전자든 후자든 혼자서 처리를 하기 위해 칼을 잡으며 방문을 열었다.
“헉!”
“엇?”
달빛이 변복을 한 애신과 동매를 비췄다. 변복을 한 애신은 사탕을 들고 서있었고, 동매는 그런 애신에게 칼을 겨눈 상태였다.
“애기씨께서 왜 여기에 계십니까?”
“나를 지킬 때만 칼을 뽑겠다고 했잖소?”
동매와 애신이 동시에 입을 열었다. 동매가 당황해하며 황급히 칼을 집어넣었다. 애신은 태연하게 사탕 하나를 입안으로 집어넣었다.
“이건, 그. 제가 또 다치면 애기씨께서 또 아파하실 것 같아서 그랬습니다.”
“말은 잘하는군.”
“그러는 애기씨께서는요?”
“나는 그대에게 사탕을 주려고 왔소.”
애신이 사탕을 또 하나 집어먹었다.
“사탕을 드시러 온 게 아니십니까?”
“글쎄.”
“헌데 왜 창문을 넘어오셨습니까? 그냥 문으로 들어오셔도 됐는데.”
“글쎄-.”
맞는 말이었다. 애신이 민망함이 섞인 세 번째 사탕을 집어먹었다. 편히 앉아서 먹으라는 동매의 말에 냅다 바닥에 앉았다. 사탕을 몇 개 더 입에 집어넣으니 입안이 가득 찼다. 볼이 사탕으로 가득 찬 애신이 너무 귀여웠다.
“정말 사탕만 먹다 가실 겁니까?”
“아 머을 애까지 아우 말 안할 거오.(다 먹을 때까지 아무 말 안할 거요.)”
동매가 웃음을 터뜨리며 애신의 앞에 앉았다.
“도와드리겠습니다.”
동매가 입을 벌리자 애신이 기다렸다는 듯 사탕을 먹여주기 시작했다. 여덟 개쯤 넣으니 동매가 손사래를 쳤다. 애신이 사탕봉투를 흔들어 남은 사탕이 몇 개 없다는 걸 들려주곤 남은 사탕마저 동매의 입안에 우겨넣었다. 딱딱해서 씹어 먹을 수도 없었다. 입안의 사탕이 다 녹아 사라질 때까지 그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입이 너무 달달하오.”
“저도 그렇습니다.”
“그대가 자처했으니 불만 마시오.”
“예?”
“아-. 나도 그렇지.”
애신이 민망함을 숨기려 봉투를 구겼다. 동매가 손을 얼굴로 가져갔다. 이어서 동매의 어깨가 떨렸다.
“웃지 마시오.”
“그게, 흐흡. 죄송합니다.”
“아. 정말.”
애신이 동매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았다. 애신의 떨림이 동매에게도 전해졌다. 별거 하지 않아도 웃음으로 가득했다. 한참을 웃다가 동매가 양손으로 애신의 어깨를 잡았다. 애신이 고개를 들어 동매와 눈을 맞췄다.
“제가 잡혀가기 전후로 무슨 일 있지 않으셨습니까?”
“우연히 내 아버님의 사진을 보았소. 운이 좋았소.”
애신이 우연임을 강조했다. 동매는 애신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고, 대강 짐작이 가기도 하여 자세히 캐묻지 않았다. 입안이 달달함을 넘어서서 아려오는 탓에 애신이 혀로 제 입속을 쓸었다. 동매의 시선이 오물거리는 애신의 입술에 꽂혔다.
“한 번에 하나씩만 먹어야겠소. 입안이 절여질 것 같소. 아니 그렇소?”
“그, 그렇지요.”
동매가 황급히 시선을 옮겼다. 동매의 시선이 제 입술에 있던 걸 눈치 채 입술에 손가락을 가져다댔다. 애신이 가만히 동매를 보다가 미소를 지으며 손을 치우고 입술을 앞으로 내밀었다. 동매의 얼굴이 붉어졌다.
“오야붕? 안에 계십니까?”
“어-어.”
“불이 켜져 있지 않아 혹시나 했습니다. 내일 하야시의 사람이 화월루에 온다고 합니다.”
“알았다.”
유죠의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자 애신이 소곤거렸다.
“가끔 보면 그대의 사람들이 좀 무섭소.”
“저는 함안댁이 더 무섭습니다.”
“함안댁을 이길 자는 아무도 없소.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안에 돌아오라고 명령을 받았소.”
애신이 더 여기에 있다간 함안댁에게 혼나겠다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동매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애신을 따라 일어섰다. 창문을 활짝 열고 근방에 행인이 있는지 확인을 했다. 다들 두려워하는 것도 있지만 일전의 사건 때문에 한성지부 건물의 근처에는 개미새끼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바로 내려가셔도 되겠습니다. 제가 더 도와드릴 게 있을까요?”
“발을 놀래는 건 그대보다 더 자신이 있소.”
“하긴-”
동매가 애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는데, 볼에 말랑한 무언가가 닿았다. 쪽-하는 소리와 함께 애신이 창문을 넘어갔다. 애신이 행인들 사이로 녹아 들어가는 모습을 멍하니 바라봤다. 애신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머리를 벽에 쿵쿵 박았다.
***
납채서_서신/
상처가 다 아물었기에 평소와 같은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제빵소에 들릴 때마다 저 이름으로 달린 사탕이 없었다. 애들을 시켜 알아보니 애신이 학당에도 며칠 째 나오지 않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빈관에 묵는 이들은 무언가 더 알지 않을까 하여 빈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쩐 일이야?”
“내가 일이 있어야만 오나.”
“요즘 보면 그런 것 같은데?”
“그렇게 느꼈다면 미안하고.”
빈관의 문이 열리더니 희성이 들어왔다. 희성의 낯빛은 어두웠고, 손에는 붉은 봉투가 들려있었다.
“그대들의 대화에 끼어들고 싶으나, 오늘은 내 상태가 영 아니어서 먼저 올라가겠소.”
“굳이 베어드릴 필요가 없어 보입니다.”
“걱정 해주는 거요?”
“제 수고가 덜었단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답례로 작은 조언을 하나 해주겠소. 그대를 찾는 이가 있을 거요.”
“예?”
“그럼 나는 이만.”
희성이 할 말만 하고 계단을 올랐다. 히나는 눈치를 챈 모양인데, 동매는 희성의 손에 들린 붉은 봉투가 무엇인지 모르는 눈치였다.
“무슨 소리인지 알겠어?”
“흠- 직접 알아봐.”
별 수확 없이 다시 길을 나섰다. 저를 찾는 이가 한성 지부나 화월루에 찾아오지 않을까 싶었다. 골똘히 생각하며 길을 걷는데 저 멀리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보소!”
*
함안댁의 뒤를 따라 고가 댁 대문을 넘었다. 동매를 발견한 식솔들이 웅성거렸다. 예전과는 동매의 상태도 상황도 달랐다. 함안댁과 동매가 고사홍의 방을 향해 걸어가자 식솔 하나가 애신에게 달려갔다.
“대감마님. 찾으시던 자를 데려왔습니더.”
고사홍이 헛기침을 하면서 밖으로 나왔다. 어떤 사내이든 크게 호통을 칠 생각이었는데, 일색을 한 동매를 보자 머리가 어질 거렸다. 뒤이어 애신이 뛰어왔다. 고사홍이 머리를 집으며 방으로 들어갔다. 동매가 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먼저 들어가려는 애신을 잡았다.
“이미 혼나시지 않으셨습니까?”
“매도 먼저 맞고, 함께 맞아야 덜 아프오.”
애신과 동매가 방으로 들어가 고사홍의 앞에 나란히 무릎을 꿇어앉았다.
“정녕 이 일본 놈이 네 정인이란 말이냐?”
“소인, 일본에도 조선에도 발을 붙이고 있지 않지만, 애기씨의 정인은 맞습니다.”
“...연유야 어찌 되었든 일본인의 행색을 하고 있지 않느냐. 그게 일본의 앞잡이라는 게 아니면 무어란 말이냐. 애신이 네가 어찌, 하필이면 어찌.”
고사홍의 말문이 막혔다. 일본에게서 조선을 지키다가 죽은 제 아들들과 일본에게서 조선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저와 애신이었는데, 그런 애신의 정인이 저런 자라는 게 말문도 숨도 턱 막히게 만들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이 자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가 무어라 할지도 잘 알겠구나. 혼인은 깨도 이 자는 절대 안 된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피가 들어가도 절대 안 된다.”
“허락을 하지 않으셔도 애기씨를 지키겠다고 말씀드릴 요량으로 왔습니다.”
“낯짝도 두껍구나. 내가 고마워 할 성 싶으냐!”
예상대로 고사홍은 분노가 섞인 말을 내뱉었다. 동매가 품에서 서신 하나를 꺼냈다. 며칠 전 우체사 총판이 찾아와 동매에게 받쳤던 서신이었다. 고사홍은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동매가 건네준 서신을 펼쳐보았다. 단박에 방방곡곡의 선비들에게 보냈던 서신임을 알아챘다.
“이, 이게 왜 네놈에게 있는 것이냐?”
“아는 이에게 얻었습니다. 나머지는 다 태워졌다고 합니다.”
애신은 대체 어떤 서신인지 알지를 못하여 두 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순식간에 분노가 가라앉은 고사홍을 보며 중한 서신임을 짐작했다.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기까집니다.”
동매가 자리에서 일어서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고사홍이 어쩔 줄을 모르는 애신에게 행랑아범을 부르라며 밖으로 내보냈다. 나가보니 동매의 모습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애기씨요. 무슨 일 있었습니꺼?”
“어어. 할아버님께서 행랑아범을 찾으시네.”
“동매 그자는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더.”
함안댁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애신이 움직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았지만, 그보다 더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대문을 넘으니 담장 아래에 쪼그리고 있는 동매가 보였다. 동매의 시야에 애신의 치맛자락이 들어왔다.
“혼인은 정말 깨진 겁니까?”
동매가 고개를 숙인 채 치맛자락을 손에 쥐었다. 애신이 동매의 앞에 앉으며 가만히 동매의 손을 잡았다.
***
총상2/
새로운 달의 보름, 그리고 외출금지가 풀리기도 한 날이었다. 그동안 동매가 제빵소에 달아둔 사탕이 몇 궤짝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과 기대를 한껏 부풀린 채 발을 옮겼다. 맞은편에 걸어오던 희성이 애신을 발견하고 반갑게 웃었지만, 애신은 그를 지나쳤다.
“오랜만이오.”
희성의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뒤를 돌아봤다.
“나를 못 알아보고 지나치다니, 급한 일이 있나보오?”
“아. 그동안 잘 지냈소?”
“나야 뭐. 항상 잘생겼소. 그대는 저잣거리의 험담 때문에 집에서만 지내던 게 아니었소?”
“그럴 리가 없소. 외출금지가 이제야 풀린 거요.”
“출소를 한 느낌이구려. 축하하오.”
“탕-”
애신의 발걸음이 향하던 쪽에서 총성이 들렸다. 곧바로 또 한 번의 총성이 울렸다. 함안댁과 희성은 애신을 보호하려고 했으나 애신은 이미 저 만치 튀어나간 상태였다. 상상하고 싶지도 않은, 불안한 예감이 애신을 휘감았다. 저 멀리 제빵소와 그 앞에 쓰러진 사내가 보였다.
“구동매!!”
애신이 동매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쓰러진 동매의 가슴팍에서는 피가 샘솟고 있었다. 무얼 해야 하는지, 무얼 할 수 있는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인력거와 이자의 낭인들을 불러오시오!”
뒤따라온 희성이 동매의 상태를 확인하고 함안댁과 제빵소 주인에게 부탁을 했다. 지혈을 위해 동매의 상체를 들어 올려 제 몸에 기댔다. 총을 맞은 건 동매인데, 보다 더 상태가 좋지 않아 보이는 건 애신이었다. 얼굴이 새하얘진 채로 피 웅덩이에 앉아 온몸을 떨고 있었다.
“손이라도 잡아주시오. 심장은 피한 모양이니 빨리 병원에 가면 괜찮을 거요.”
애신이 바닥을 더듬대며 동매의 손을 찾았다. 양손으로 동매의 손을 쥐어 제 얼굴에 가져다댔다. 애신의 얼굴이 피와 눈물로 범벅됐다.
달려온 낭인들이 동매를 들어 인력거에 태우려는 때에도 애신은 동매의 손을 놓지 않으려 했다. 함안댁에 애신을 끌어안아 등을 토닥였고, 희성은 저에게, 동매의 사람들에게 맡기라고 걱정 말라고 달랬다.
*
희성이 따로 불러둔 인력거에 함안댁과 함께 올랐다. 손과 옷에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같은 상황을 겪은 적이 있었다. 총에 맞아 쓰러진 건 저였고, 그런 저에게 달려온 건 동매였다.
“인력거를 돌리게.”
“예?”
“병원으로. 빨리!”
동매의 곁에 있어야 했다. 비록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도 그의 곁에 있어야 한다. 동매가 곁에 있다는 것 자체로도 힘이나 견딜 수 있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집이 아니라 동매에게 돌아가야 한다. 정신이 또렷해지기 시작했다.
병원 입구는 동매의 낭인들로 인해 위협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병이나 상처를 입은 환자들도 차마 병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는 상태였다. 피범벅이 된 애신이 병원에 들어가려고 하자 걱정스런 마음에 애신을 잡으려는 이들이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애신은 낭인의 안내를 받으며 병원으로 들어갔다. 동매의 병실 앞에는 유죠를 비롯한 낭인들과 희성이 있었다. 희성이 복도를 걸어오는 애신에게 걱정의 손길을 내밀었으나 애신은 단호하게 거절했다.
“수술은 잘 끝났소. 다만, 마취 없이 수술을 해서-”
“그게 무슨 소리요? 마취 없이 수술을 했다니?”
“의사를 믿을 수 없다며 구동매가 요구했소. 지금은 의식이 돌아오기를 기다릴 뿐이오.”
다시금 사방이 적으로 가득한 사내임을 깨달았다. 애신이 병실의 문을 열려는데 희성이 앞을 막았다.
“정말 괜찮은 거요? 혹시 몰라 알려주는데, 아까는 총을 맞은 게 그대인지 구동매인지 헷갈릴 정도였소.”
“걱정 고맙소. 하지만 이제는 정말 괜찮소.”
병실로 들어가니 누워있는 동매의 곁에 기모노를 입은 여인이 있었다. 예전의 상황과 비슷했다. 그 때에는 총상이 아니라 고문으로 인한 상처였고, 병원이 아니라 동매의 방이었다. 호타루가 자리를 비켜줄 생각이 없어보이자 유죠가 호타루를 데리고 나가려했다.
“그러지 마시오.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으나 동매가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은 나도 같소.”
애신이 굴러다니던 의자를 끌고 와 호타루의 맞은편에 앉았다. 호타루와 애신의 사이에는 누워있는 동매가 있었다.
“그리고 병원 앞에는 사람을 물리시오. 치료가 필요한 이들까지 막을 필요는 없잖소.”
“예. 그리 하겠습니다. 그럼.”
유죠가 병실 밖을 나갔다. 애신과 호타루는 조용히 동매의 곁에서 자리를 지켰다.
*
한 시진 쯤 지나자 함안댁이 애신의 새 옷과 집안에 벌어진 소식을 들고 찾아왔다. 고사홍을 비롯한 선비들이 잡혀갔고, 일본군들이 집을 뒤졌다고 했다. 뒤이어 유진이 미군을 끌고 와 상황은 나쁘지 않게 종료되었다는 말에 약간 안심되었다.
“그라도 집에 가보셔야 하는 게 아닐까예?”
“일단 여기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소. 할아버님은 감옥에 있어 안전하실 거고, 그대는 여기에 있는 게 안전할 거요. 아무리 구동매가 쓰러졌다고 해도 구동매의 낭인들까지 다 쓰러진 게 아니니.”
희성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애신이 병원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도, 수많은 낭인들에게 둘러싸인 애신을 잡아가기엔 소모가 클 게 틀림없었다.
“내가 어떻게든 정보를 모아 알려주겠소. 그러니 그대는 여기에 꼼짝 말고 있으시오. 구동매도 그러길 바랄 거요.”
“고맙소.”
진심이 가득 담긴 감사인사였다. 옛 정혼자, 그리고 옛 정혼자의 정인을 위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희성이 너무나도 고맙고 미안했다. 희성이 병실을 나서자 애신이 환복을 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말고도 동매를 아끼는 자들이 많기에 믿고, 안심하고 일어설 수 있었다.
“잠시 나갔다 오겠소. 그동안 동매를 잘 부탁하오.”
호타루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태껏 아무런 말이 없는 호타루와 바닥에 나뒹굴던 잡기장과 세필 붓을 눈여겨보며 병실을 나갔다.
*
둘 만을 위한 이야기
! 주의 !
!원작의 메인 러브라인을 동매-애신으로 뒤틀었습니다. 다른 캐들에게 정말 미안해!
!파트와 파트 사이의 빈 시간대 엄청납니다. 흐름은 비슷한데 띄엄띄엄!
***
프롤로그_애신/
도망치던 소년을 한성 끄트머리에 내려주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소년이 가마에서 내리고 가볍게 목례를 하고 달려가던 때에도 말 한마디 없는 애신을 이상하게 여긴 함안댁이 먼저 말을 걸었다.
“애기씨요. 저 놈이랑 무슨 일 있으셨어예?”
“...아무것도.”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
모두가 다 좋은 소리만 해주고, 아껴주는 하루하루만 보내던 어린 애신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듣는, 겉에도 속에도 날카로운 칼만 가득 담긴 말 한마디였다. 단 한마디. 그 한마디가 어린 애신의 가슴 속 깊이 박혔다. 그 기억은 그 어느 기억보다 선명하고, 그래서 더 아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억은 아픔과 함께 깊은 생각을 선사했다. 곱디고운 빛깔을 뽐내는 치마와 저고리를 입고 가마에 타고 있던 자신과 해지고 해져서 옷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차림을 하고 도망치던 상처투성이의 소년.
왜 저는 그 소년이 도망친 백정의 자식이라고 알아챘을까, 만일 그 소년의 행색이 달랐다면 그렇게 알아챌 수 있었을까, 왜 저는 곱고 그 백정 소년은 상처로 얼룩졌을까- 하는 수많은 생각들이 매일매일 떠올랐다.
그래서 하루는 할아버님께 여쭤보았다. 왜 저는 가마 안에 있었고, 왜 그 소년은 도망을 쳤어야 했냐는 애신의 질문에 고사홍은 신분이 법이 그렇다고, 죗값을 받아야하는 자를 왜 도와주었냐며 호되게 혼을 냈다. 노예제가 폐지된 이후에 다시 한 번 더 물었으나, 고사홍의 답은 변함이 없었다. 법이 달라졌어도 태어난 신분이란 건 달라지지 않는다는 모순이 가득한 답이었다.
고작 신분. 신분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호사를 누리는 제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길에서 다가오는 모든 이들에게 웃으며 인사를 했고, 어려움을 겪는 모든 자들에게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애신은 고사홍의 후광에 못지않은 성품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고사홍 어르신네 작은 손녀는 성품도 외모도 곱다는 이야기는 저잣거리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
프롤로그_동매/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 ... .”
동매가 작게 조선어로 중얼거렸다.
“예?”
뒤에 있는 사내의 소리가 연이여 들렸다. 순간 동매는 아차- 싶었다. 요즘 들어 자신을 따르는 자들이 조선말을 배우고 있는 걸 잠시 잊었다. 혼잣말이었다며 유죠의 관심을 돌리고 다시 생각에 잠겼다.
처음으로 사람을, 자신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소녀를 베었다고 생각했는데, 손잡이 없는 양날의 칼이었던 모양인지 제 자신도 퍽 아팠다. 그 고통은 아직 제 손에 남아있었고, 또한 작은 가마 안에서 마주 앉아 자신의 눈을 쳐다보던 그 소녀의 눈빛을 잊지 못했다.
분명 곱게만 자랐을 양반 댁 애기씨가 처음으로 다쳐본 게 아닐까, 얼마나 아팠을까, 그 아픔을 아직도 지니고 있을까, 아직 지니고 있다면 자신도 기억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떻게 자랐을지 모를 그 소녀의 눈빛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3년도 안 돼서 무신회의 간부 자리에 오른 자신을 내쫓고 싶어 하는 다른 간부들이 귀찮아서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는데, 묘안이 떠올랐다.
“니들 조선말은 얼마나 늘었냐?”
“아, 오야붕께서 하시는 말씀은 거의 알아듣습니다.”
“그럼 됐네. 가자- 조선으로.”
제 자신을 따르는 부하들을 데리고 조선을 향한다고 하니, 간부들이 필요한 자금까지 대주겠다며 두 팔 벌려 환영했다. 동매는 조선에 가자마자 뒤늦은 복수를 하고, 애신의 거처를 알아봤다.
보릿고개마다 곳간을 열어주던 양반 댁으로 기억한다고 말을 다 끝마치기도 전에 만물상의 일식이 고사홍의 자택 위치를 빠르게 읊었다. 고사홍 댁에 해코지라도 하면 어쩌나 싶은 일식의 걱정과는 다르게, 동매는 다시 길거리로 돌아갔다.
“찾아가지 않으시는 겁니까?”
“가서 뭐하게. 그 백정 놈이 돌아 왔습니다- 하고 인사나 할까?”
동매가 일본공사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 뒤에는 수십 명의 무신회 낭인들이 함께했다.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동매는 그 날 이후로 진고개를 천천히 접수하기 시작했다. 기존에 있던 건달무리의 반발을 무력으로 지워버렸으며, 진고개의 모든 상인들에겐 보호를 빌미로 자릿세를 약속받아냈다. 그렇게 무신회 한성지부를 차리고 나니 조선에 거주하려는 일본인들이 진고개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한성에서 그 누구도 저를 백정이라고 깔보지 못하고, 오히려 제 모습만 보여도 길일 열릴 정도로 힘을 키우기까지 시간이 퍽 걸렸다. 이제야 한숨을 돌린 동매는 애신을 만날 순간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
눈깔사탕1/
왜놈들이 저를 향해 킬킬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했지만 불쾌했다. 왜놈들 열의 아홉은 저를 보고 기분 나쁘게 쑥덕댔으며, 그 중 험한 몇은 다가와 위협과 희롱_이라고 추정_을 했다. 그래서 왜놈들이 많은 진고개는 최대한 피해왔고, 들려야 할 일이 생기면 언제나 식솔들을 대동했다. 왜놈들에 대한 불쾌함을 애써 무시한 채, 눈깔사탕을 몇 개 집어다가 식솔들에게 나눠주고 제 입에도 하나를 넣었다. 달았다. 어찌나 달달한 지 자동적으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 미소도 잠시, 킬킬대던 왜놈들이 걸어오기 시작했다.
‘소란을 일으키는 것보단 피하는 게 낫겠어.’
함안댁에게 서둘러 돌아가자는 말을 꺼내려는 찰나에 붉은 사내가 나타나 애신의 시선을 끌었다. 분명 처음 보는 사내인데, 어딘가 낯이 익었다. 제빵소 주인이 저 사내가 구동매라며 설명을 해왔고, 순간 선명한 기억 하나가 애신의 뇌리에 스쳐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붉은 사내는 칼을 휘둘렀다.
“아이고. 애기씨, 보지마이소!”
함안댁의 손가락 사이로 보이는 붉은 사내의 모습이 보였다. 붉은 사내는 칼을 더 휘둘러 그의 얼굴과 칼끝, 사방을 붉게 만들었다. 그 사내의 모습을 더 눈에 담고 싶은 마음에 함안댁의 손을 살며시 치웠다. 곧바로 동매와 눈이 마주쳤다.
‘저 자가... ... .’
‘저 여인이... ... .’
그렇게 한참을 서로 눈빛을 주고받았다. 10여 년 전에 보았던, 놀람과 두려움이 담겼던 눈빛과 경계와 경멸이 담겼던 눈빛은 아니었다. 애신은 함안댁의 손에 이끌려 다시 가마를 타고 집으로 향했고, 동매는 달려온 유죠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집으로 가던 길에서도 제 방에 들어와 취침준비를 하면서도 애신의 머릿속엔 아까 보았던 동매의 모습만 가득했다. 애기씨가 구해준 귀한 목숨으로 흉측한 짓을 한다며 궁시렁 거리는 함안댁의 말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잊을 수 없는, 칼보다 날카로운 말로 자신을 베었던 사내는 변함없이 다른 이들을 칼로 베고 있었다. 허나 동매가 자신을 보는 눈빛에는 변함이 있었다. 사나움 속에서 약간의 그리움과 반가움을 읽었다.
“그 구동매란 자는 한성에서 지낸다고 했던가?”
“예. 그렇지요. 아까 들어보니까네 진고개를 휘어잡았다고 하드라고예. 아까처럼 사람도 막 베는 것 같고. 으미 보기 싫은 것”
“나보고 손가락질하는 왜놈들이 더 보기 싫네.”
“아이고마 상스러운 것들. 거기는 다니지 않는 게 좋겠지예?”
“...응.”
애신은 대답과는 달리 다시금 동매를 마주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훤칠해진 키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월등히 우람한 몸, 10여 년 전의 앳된 모습이 약간은 남아있는 얼굴까지는 볼 수 있었으나,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았다. 목소리를 듣고 싶고,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하고, 자신을 기억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리고 칼을 꺼내들은 이유가 자신의 예측과 같은지 궁금했다. 애신은 그렇게 한참을 뒤척이다 겨우 잠에 들었다.
*
동매가 창틀에 걸터앉아 제빵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애신은 돌아가고 없는데, 아직 애신이 있는 듯 보였다. 눈을 감으면 웃음을 머금은 애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어서 자신을 보자마자 표정이 굳는 애신의 얼굴까지. 아련해지던 와중에 빠르게 다가오는 발걸음 소리가 동매를 방해했다. 발걸음 소리가 멈추더니 창호지문에 실루엣이 비쳐보였다. 유죠에게 아까 있었던 일을 듣고 달려온 호타루가 분명했다.
“들어와.”
실루엣이 움직이질 않았다. 평소 같지 않음을 느낀 동매는 발걸음을 옮겨 문을 열어젖혔다. 호타루가 가만히 서서 잡기장에 글을 써내려가고 있었다. 잔소리가 분명하다-싶은 참에 호타루가 잡기장을 펴들었다.
[십 수 년 만에 만났던 거라면서? 그런데 칼을 뽑았다니 왜 그랬어.]
“그러게 말이다. 변함없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봐.”
[돌대가리.]
“나도 알아.”
동매가 씁쓸히 웃었다. 애신에게 보여준 제 모습은 다 칼을 쥐고 있어서 씁쓸했고, 애신은 예전과 변함이 없이 곱디 고와서 웃음이 났다.
동매가 조선으로 돌아온 지 딱 1년이 되는 날이었다.
***
가마터1/
고사홍이나 고애신에 대한 정보를 가져오면 돈을 주겠다는 소문을 살짝 흘렸더니, 찾아오는 이들이 제법 많았다. 양인과 말을 섞는 걸 길 건너로 보았다, 어느 집 여식과 말을 나누는 걸 보았다 등의 정말 자잘한 정보부터, 오늘 애기씨가 약방에 들렸었다, 홍파와 함께 배를 타고 강을 자주 건너신다, 신식학당에 가셨었다, 산에 움막을 짓고 사는 포수에게 맷고기를 사러 가셨더라 등의 정보는 여러 번 반복해서 들어왔다. 그 덕에 동매는 애신의 거취를 어림짐작 할 수 있었다.
“강 건너에 사람이 갈만한 곳이 있냐?”
“자세히는 모르지만 가마터가 있다고 합니다.”
가볍게 던져본 질문이었는데, 즉각 답이 돌아왔다. 혹시나 싶어서 세부적으로 더 알아놨던 유죠였다. 아마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제 자신을 포함한 그 누구보다 자신을 꿰뚫어보는 사람이 유죠가 아닐까 싶었다. 쇠뿔도 단김에 뽑기 위해 애들 몇을 데리고 강가의 나루터로 향했다. 가는 길에 익숙한 가마가 골목으로 사라지는 모습이 보였다. 달려가 가마를 잡아둘지 묻는 유죠에게 괜찮다며 발걸음을 옮겼다. 나루터에 도착하자 홍파가 부리나케 달려왔다.
“일어는 못 하는데, 할 생각도 없는데 어쩌나?”
“일어를 쓰실 필요 없습니다.”
유창하게 조선어로 대답하는 동매의 모습에 홍파가 적잖이 당황했다. 조선어를 쓰든, 조선인이든 행색은 영락없는 일본인이었다. 이들이 절대 강을 건너게 해서는 안 된다는 직감이 들었다.
“칼을 차고 가봤자, 간장종지 하나도 못 받아갑니다.”
“도기엔 딱히 관심이 없습니다.”
“지금은 사공이 없으니 수일 후에 다시 오시죠.”
“사공은 필요 없고, 배만 좀 빌리겠습니다.”
동매를 막으려는 홍파보다 유죠의 움직임이 빨랐다. 유죠가 홍파의 앞을 막아서더니 동전을 홍파에게 건넸다. 가마터에 위협이라도 알려야하는데, 강을 건너가는 건 동매뿐이고 나머지 낭인들은 떠나가는 배를 쳐다보며 근처를 서성거리니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지금까지 무신회는 의병들에게 방해되는 일을 일체 하지 않아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갑자기 이리 움직이니 크게 걱정이 되었다. 청자를 팔아달라는 요구이길, 황은산이 여느 때와 다름없이 태연하게 내쫓기를 바랄 뿐이었다.
“네놈들에겐 안 판다-!”
황은산이 가마터에 발을 디디는 동매를 발견하자마자 소리쳤다. 옆에서 약간 엉성한 조선어를 쓰는 일본인이 황은산의 입을 막았다. 일본인에겐 팔지 않는다면서 일본인을 제자로 둔 듯 보였다.
“자르 몬보이면 큰일나오! 그거 그거! 아까 금 간 거!”
“어쭈? 이놈아! 저런 놈들한테는 새까맣게 태운 사발 조각도 아깝다!”
“살 생각도 없습니다. 나으리.”
“그럼 뱃놀이를 오셨나?”
“고사홍 댁 막내 애기씨가 자주 온다고 들었습니다.”
“그, 그게 뭐? 어디가 이상하신가?”
무신회 한성지부의 오야붕이 가마터에 온 것도 심상치 않은데, 그의 입에서 애신의 이름이 나와 적잖이 당황한 황은산이었다. 그걸 놓칠 리 없는 동매는 애신이 평범하지 않은 일로 가마터에 찾아온다고 짐작했다. 단지 강 건너에 무엇이 있는지 궁금해서 와보았다고 간단히 인사를 건네고 다시 노를 저었다. 동매의 모습이 사라지자 황은산이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무언가 건수를 잡은 게 아니면 애기씨를 노리는 느낌인데. 전자면 일이 더 커지기 전에 잡아야하고... ... .”
“후자이며는 어찌함니까?”
“조금 더 지켜보다가 잡아야지.”
***
기차역/
“애기씨가 식솔 몇을 데리고 제물포의 양장점에 간다구 했어요. 기차타고 간다고 함안댁이 신나서 자랑을 하던데... ... .”
옷 감집 여주인이 동매의 눈치를 보며 말 끝을 흐렸다. 동매가 눈짓을 하자 유죠가 동전을 건넸다.
“아까 보니까 오늘 기차를 탄 것 같았어요. 아이고~ 이게 왠 떡이야~”
그 여주인은 동전을 받아들고 연거푸 머리를 숙이며 밖으로 사라졌다. 근방에서만 머물던 애신이 갑작스레 제물포에 간다니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나 없는 동안 얌전히 있어라.”
“두세 명 정도 부를까요?”
“됐다. 시선 끌긴 싫어.”
*
동매는 기차가 도착하기 한 시진 전부터 한성역에서 애신을 기다렸다. 너무 일찍 왔나- 싶다가도 애신의 얼굴을 볼 생각에 기다림이 즐겁게도 느껴졌다. 기다리던 기차가 도착을 했는데, 역 근처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어느 정도의 어수선함을 뛰어넘어 미군들이 바삐 움직였다. 미군들이 한복을 입은 조선인 여자들을 총으로 위협해 붙잡아두기 시작했다. 그러던 와중에 기차 밖으로 나온 고운 빛깔의 애신이 동매의 시선을 단숨에 뺏어갔다. 이어서 미군들이 애신에게도 다가가서 총으로 위협을 했다.
“구동매?”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익숙한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뒤를 돌아보니 쿠도 히나가 있었다.
“네가 여기엔 무슨 일이야?”
“일 때문에.”
“그 일에 칼이 쓰이나봐?”
동매는 히나의 말을 듣고서야 제 손이 칼에 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게다가 분명 멀리에 있던 애신도 몇 걸음만 더 걸으면 말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이 있었다.
“이렇게까지 정신없는 구동매는 처음 보는데? 일없으면 비켜줄래? 내 일하게.”
히나가 여급을 데리고 애신과 미군들 사이로 들어갔다. 그 덕에 동매는 인파 속에 몸을 숨길 수 있었다. 귀를 기울여보니 미군들의 총기 하나가 사라져 그 행방을 찾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히나가 애신과 옷을 바꿔 입기 위해 기차에 들어갔다. 양장의 애신과 한복의 히나. 어느 한 쪽도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시 기다리자 붉은 저고리의 히나가 기차 밖으로 나왔다. 이어서 검은 머리의 미군이 기차에 들어간 걸 보니 애신은 나오지 않을 촉이 왔다. 결국 근처를 거니는 히나에게 발걸음을 옮겼다.
“어쩌나. 그 여인은 나오지 않을 텐데.”
“왜 내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눈치가 빠른지.”
“네가 쉽게 읽힌다는 뜻도 돼.”
“그래서 오랜만의 한복은 느낌이 어때?”
“음~ 역시 나는 뭘 입어도 소화를 잘한다는 느낌?”
히나가 몸을 한 바퀴 돌렸다. 저 멀리서 히나를 부르는 함안댁의 소리가 들려, 동매는 히나를 향한 몸을 돌리지 않은 채 그대로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정말 길가는 아홉 살짜리 어린아이도 알아챌 수 있는 동매의 행동이었다.
동매는 어느 정도 걷다가 다시 역을 향했다. 애신의 뒤를 쫓아가고 싶었지만, 히나에게 들키기도 했고, 그 검은 머리의 미국인이 신경에 거슬렸다. 다른 미군들의 행동을 보면, 조선인 아녀자들의 치마 속을 확인하라는 명령을 내린 자는 분명 그 미국인이 틀림없었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했던가, 검은 머리의 외국인이 동매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진고개도, 한성도 아닌 곳에는 무슨 일이오?”
“... ... .”
“아까 보니 누굴 기다리는 것 같던데.”
“저는 제 일을 했고, 나으리는 나으리 일을 하신 거겠지요.”
“총기가 하나 없어져서, 수상한 자들을 조사하는 중이오.”
“이 자는 총보다는 칼을 선호한답니다.”
어느새 다시 양장을 한 히나가 동매와 유진 사이의 공격적인 대화를 막아섰다.
“그리고 제 경호를 잠시 부탁했지요. 잃어버린 총기는 나중에 찾으시고 일단 제 호텔로 가시지요. 다들 이동하느라 지친 모양인데.”
“그게 좋겠군.”
유진이 별말 없이 부하들을 통솔하러 사라졌다.
“빚이 하나 생긴 느낌이네.”
“도움 받았다는 느낌은 없는데.”
“아니 너 말고 저 자. 그냥 두었다간 이미 네 칼에 베였을 걸?”
***
호텔 글로리1_눈깔사탕2/
애순을 찾기 위해 들린 빈관이었는데, 애순은커녕 신식 학당에 다니기로 결심하는 데에 있어서 큰 공을 세운 두 사람만 만났다. 양인들의 언어를 섞어 쓰는 히나와 동지인 줄 알았던 검은 머리의 미국인을 거치고 나니 진이 다 빠졌다.
“아따 으리으리하네예. 주막이 견주지도 못 하겠습니더.”
“할아버님께 애순언니가 놀음을 하러 다닌다고 말씀드려야겠네.”
“그래도 덕분에 빈관 구경도 쏠쏠히 하고 좋긴- 음머야, 세상에.”
가마 앞에 익숙한 붉은 사내가 서있었다. 구동매였다. 반가운 애신과는 달리 함안댁은 동매에게 불만을 표했다.
“기, 길도 넓은데, 왜 여기 서가 이라제?”
“오랜만일세.”
애신이 먼저 인사를 건네 버리는 바람에 동매와 함안댁 둘 다 당황해 애신을 쳐다봤다.
“그간 무고하셨습니까? 애기씨.”
“자네가 돌아왔단 소식을 최근에야 들었네. 보기도 보았고.”
“이런 미천한 자에게 관심을 가져주시니 감개무량합니다.”
“그런 말 말게. 아니면 자네에게 나는 여직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인 겐가?”
동매가 놀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게 대체 무슨 말이냐며 함안댁이 물어왔지만, 애신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가마에 올라타 집으로 향했다. 동매는 가만히 서서 애신을 태운 가마가 저 멀리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빈관으로 들어갔다.
*
뜻밖의 상대를 연달아 만나 애신의 마음이 싱숭생숭하였다. 앞서 만난 자는 기억 저 편에 묻어둔 채, 동매에게 건넨 제 말이 계속 마음에 걸렸다. 수많은 말 중에 하필이면 그 말을, 자신에게 잊을 수 없는 아픔으로 남은 말을 다시 동매에게 돌려준 게 후회됐다. 이런 마음을 간직한 채 집으로 돌아가긴 싫었다.
“함안댁.”
“예. 애기씨.”
“제빵소에 들리고 싶네.”
“지금예?”
“지난번에 덜 먹은 사탕을 마저 먹고 싶어.”
“그라모 쇤네가 집어올 테니까 애기씨는 얌전히 안에 계시소.”
애신이 또 왜놈들에게 손가락질 당할지 몰라 경계하는 함안댁의 모습에 애신이 고집을 반 쯤 접었다. 얌전히 가마 안에서 함안댁이 건네주는 사탕봉투를 받아들었다. 봉투 안의 알록달록한 사탕들 중에서도 붉은 색의 사탕을 제일 먼저 꺼내 들었다. 붉은 사내가 다시금 떠오르는 색이었다. 그와의 만남은 이 사탕과 같이 붉었으며, 달지 않았으나 사탕보다 더 달았다.
*
중한 일이 있다며 동매가 빈관 밖을 나섰다. 중한 일, 제빵소에 가서 사탕을 사는 일이었다. 그것도 애신이 웃음을 꽃피우며 먹던 바로 그 붉은 사탕을. 돈을 받지 않겠다는 제빵소 주인에게 동전을 던져주고 천천히 걸어가며 사탕을 맛보았다. 그리고 애신과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애신이 자신에게 먼저 인사를 해줄 줄 몰랐다. 그리고 어린 애신을 베었던 그 말이 애신의 입에서 나올 줄 몰랐다. 가마 안에서의 일을, 자신을 아직 기억해주는 애신의 모습에 가슴이 아프면서도 가슴이 뛰었다. 사탕의 달콤함으로 가슴을 달래며 방으로 올라가 창틀에 몸을 기댔다. 저 멀리 보이는 하늘도 붉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호타루가 동매를 보고 놀랐다. 동매가 이 시간에 방에 있을 줄 몰랐던 모양이었다. 동매가 잡기장을 펼치려는 호타루에게 사탕봉투를 건네주었다. 붉은 색의 사탕만 가득했다.
“그 날 네 운세. 다 틀렸더라.”
***
호텔 글로리2/
얼토당토않은 말을 하는 미국인, 유진과 뜬금없이 나타난 정혼자, 희성 때문에 정신적인 피로가 여간 쌓인 애신이었다. 기분이라도 풀자는 생각으로 총포 연습을 하러 산을 올랐다.
로건을 노리던 두 방의 총성을 떠올렸다.
“탕-”
애신과 같다며 건네주던 꽃다발을 떠올렸다.
“탕-”
붉은 사내와 눈을 마주치던 순간이 떠올랐다. 방아쇠를 당기지 못했다. 더는 방아쇠를 당길 수 없었다. 결국엔 총포를 내리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하산 할 때는 기분이 좀 나아있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싱숭생숭한 기분으로 하산을 했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방에 들어와 보니 애신의 마음을 하나도 모르는 함안댁이 희성이 준 꽃을 화병에 넣어 놨다. 가져다가 버리려는데, 희성이 서신과 꽃가마를 보내왔다. 그 두 개만 보내왔다면 단칼에 거절을 했을 텐데, 사람도 함께 보내온 바람에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다. 희성과 제대로 담판을 짓기 위해 가마에 올랐다. 어쩌면 동매를 마주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 가마에 올랐다.
*
희성과의 담판을 짓기는커녕, 그가 제안한 적당한 타협에 만족해야하나 싶은 상황이었다. 이 불편한 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은 순간에 때마침 동매가 빈관에 들어왔다.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동매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대로면 놓칠 성싶어 볼 일이 있다며 자리를 벅차고 일어났다. 동매를 향해 몇 걸음 걸어가자 동매가 발걸음을 멈춰 애신을 기다렸다.
“자네가 이리로 찾아올 줄 몰랐소.”
“어디에 계신가 싶었는데, 여기에 계셨군요. 소인이 잘 찾아온 모양입니다.”
“나 또한 자네가 어디에 있을지 궁금했소. 앞장서시오.”
그 짧은 순간에 애신의 상황을 다 파악했는지, 동매가 말을 잘 맞춰주었다. 무어라 묻는 희성의 말을 뒤로한 채 동매를 따라 빈관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따금 동매가 고개를 돌려 애신이 잘 따라오는지 확인하며 발걸음을 맞췄다. 그렇게 빈관이 보이지 않을 거리까지 걷다가 동매가 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애신에게 말을 건넸다.
“어디까지 모실까요?”
“아, 적당히 인적이 드문 곳으로 부탁하오.”
순간 한성의 모든 곳이 동매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
“갑자기 미안하네. 자네의 일을 방해한 건 아닌지.”
“소인 놈을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애기씨.”
“지난번에 내가 했던 말도-”
“그 일 또한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동매가 애신의 말을 끊었다. 10여 년 전에 애신에게 내뱉었던 말에 대해서 제대로 사과를 하지 못한 상태인데, 그 말을 돌려주었다고 사과를 받을 수는 없었다. 신경 쓰지 말라고 했는데, 오히려 더 신경이 쓰였다. 화제를 돌릴 필요가 있었다.
“아까 그 사내와는 동무요.”
“그러십니까.”
“사내와 동무를 하는 건 처음이라 조금 불편했소. 그래서 이리 도움을 청해버렸고.”
“소인과는... ”
동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꺼낸 걸 후회했다. 저의 출신이 천한 백정인 걸 그 누구보다 잘 알기에.
“...아닙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이 있어서.”
동매가 목례를 하고 몇 걸음 걸어갔다. 애신은 멀어지는 동매를 향해 중얼거렸다. 동매에게 닿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네와는... 동무부터 시작하고 싶소.”
*
진고개에 돌아와 보니 애신네 식솔이 동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자는 애신의 정혼자가 조선에 돌아와 애신을 만나러 왔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다. 애신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10년째 일본에서 돌아오지 않고 있다 길래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아까 애신과 함께 있던 사내가 떠올랐다. 그리고 그 자와는 동무라던 애신의 말도 떠올랐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지만, 희망이라는 걸 손에 쥐어보았다.
아까 등 뒤로 들렸던 애신의 말이 환청이 아닐 수 있다는 희망.
***
지물포/
비가 내렸다. 호타루가 비가 와서 나가기 싫다며 동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동매에게 심부름을 시킬 자는 한성을 통틀어 딱 한 명뿐일 것이다. 혹은 둘. 호타루가 쥐어준 종이를 들고 지물포를 향하다가 길을 꺾어 제빵소에 들렸다. 최근엔 나가기만 하면 사탕을 꼭 사먹었다. 이제는 제빵소 주인도 익숙하게 동매에게 사탕 값을 받았다.
“요즘엔 빨간 사탕이 제일 잘 팔립니다요. 오야붕 덕분인가 싶습니다!”
“누가 또 나처럼 사가?”
“애신 애기씨요. 아니 정확히는 함께 온 식솔이 사가긴 합니다요.”
제빵소 주인이 함안댁이 올 때면 항상 제빵소 근처에 가마가 있다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동매에겐 닿지 않았다. 동매는 사탕 하나를 천천히 꺼내 입에 넣으며 발을 옮겼다. 제빵소 주인이 큰 소리로 안녕히 가시라고 외쳤지만 역시나 동매에게 닿지 않았다.
주륵주륵 내리는 비는 모든 행인들의 발걸음을 빠르게 만들었지만, 동매의 발걸음은 재촉하지 못했다. 동매의 머릿속은 애신으로 가득했다. 애신도 저와 같이 사탕을 자주 사먹는다- 그것도 붉은 사탕만 사먹는다- 아무래도 동무부터 시작하고 싶다는 애신의 말은 환청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유카타가 반 쯤 젖고 나서야 지물포에 도착했다.
동매는 지물포 주인에게 종이를 넘기고 덩그러니 서있었다. 참인지 거짓인지 복잡하면서도 애신 하나로만 머리가 가득 찼다. 그러던 중에 애신이 동매를 발견하곤 반가운 발걸음으로 지물포에 들어왔다. 동매가 놀라서 입을 벌렸고, 입 안에 들어있던 사탕_먹고 있던 걸 잊었었다_이 튀어나왔다. 동매도 애신도 당황한 순간이었다. 동매가 멋쩍어하며 인사를 건네려는데, 지물포 주인이 선수를 쳤다. 애신과 인사를 나누고 동매의 물건을 마저 찾기 위해 지물포 안쪽으로 들어갔다.
“많이 젖었구려.”
애신이 젖은 동매의 어깨를 탁탁 털어주었다. 아까보다 더 놀라버린 동매는 뒷걸음질을 치다 선반에 부딪혔다. 선반에 자리를 잡고 있던 잡기장과 붓 몇 개가 굴러 떨어졌다. 붓이 굴러가는 소리는 동매에게 크나큰 창피함을 선사했다.
“놀라게 해서 미안하오. 물건 값을 치러야 한다면 내가 하겠소.”
“아닙니다.”
애신이 붉어진 동매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자리에 앉아서 굴러간 붓을 줍기 시작했다. 그러자 동매도 붓을 줍기 위해 몸을 숙였다. 순간 애신의 붉은 치맛자락이 동매의 손등을 스쳐갔다. 오래전의 기억도 함께 스쳐갔다. 창피함보다 더 크나큰 죄책감이 동매를 덮쳤다. 동매의 움직임이 없자 애신이 뒤를 돌아보았다. 동매의 낯빛이 어두웠다.
“자네도 신경 쓰지 말게.”
“... ... .”
“이 일도, 오래전의 일도 신경 쓸 필요 없네.”
제 마음을 읽힌 동매가 고개를 들어 애신을 쳐다봤다. 제가 읽은 애신의 마음도 맞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허나 애신의 따스러운 눈빛이 이미 그 답을 알려주는 듯 했다. 애신은 어느새 동매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애기씨요! 이게 뭔 일입니꺼?"
가마꾼들이 비를 피할 곳을 봐주느라 뒤늦게 들어온 함안댁이 두 사이를 방해했다. 동매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빗속으로 들어갔다. 빗속으로 뒷걸음질 쳤다.
“저 놈이랑 무슨 일 있었어예? 어디 해코지 당하진-”
“않았네. 쓸 데 없는 걱정이야.”
동매와의 짧은 만남이 너무나도 아쉬웠다. 우연에만 기대다보니 언제 또 이렇게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두리번거리며 동매를 찾는 지물포 주인이 들고 있는 물건 꾸러미가 애신의 눈에 들어왔다. 좋은 생각이 들었다. 일단 바로 가마를 탈 것이라고 함안댁을 지물포 밖으로 내보냈다.
“아까 나간 사내가 사려던 물건인가?”
“예. 그런데 대체 어딜 가셨는지... .”
“내게 주게. 값도 내가 치루겠네.”
“애기씨께서요?”
애신은 결국 동매의 물건까지 손에 쥐었다. 이걸 빌미로 동매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즐거워졌다. 살게 그렇게 많았냐는 함안댁의 물음에 콧노래로 답을 했다.
***
무신회 한성지부/
애신과 가배를 마시던 자가 애신의 정혼자가 맞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저 멀리서 유죠가 달려왔다.
“지금 지부에-”
유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발걸음 속도는 점차 빨라지더니 결국엔 뛰어서 진고개에, 한성지부에 도착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둘러보던 동매는 애신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숨을 골랐다.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른다고, 무슨 소문이 날지 모른다며 빨리 나가자고 애신을 재촉하던 함안댁은 성큼성큼 걸어오는 동매를 발견하곤 입을 닫았다.
“애기씨께서 어찌 여기에... .”
동매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자네를 기다렸네. 생각보다 짧은 기다림이었지만.”
“...근처에 찻집이 있으니 거기로 모시겠습니다.”
*
동매가 애신과 함께 찻집에 들어오자 기존에 있던 손님들은 동매의 눈치를 보며 밖으로 나갔고, 찻집 주인은 더는 손님을 받지 않았다. 오히려 찻집 주인마저도 차와 다과를 내어주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요즘 진고개에는 애신에게 말만 걸어도 동매에게 베인다는 이야기가 쫘악 돌아있었다.
“자네가 진고개를 잡고 있다는 소문은 사실인 모양이네.”
“그런지 좀 되었습니다. 헌데, 무슨 일로 소인을 기다리셨습니까?”
“전해줄 게 있어서 왔네. 지물포에서 물건을 찾아가지 않았기에 내가 받아뒀었네.”
애신이 물건꾸러미를 동매에게 건넸다. 동매가 물건을 받아들곤 물건과 애신을 번갈아 쳐다봤다. 기분이 얼떨떨했다.
“겨우 이런 것 때문에 발걸음을 하시게 만들어서 송구합니다. 기별이라도 해주셨으면 소인이 찾아갔을 텐데.”
“이건 핑계일세. 실은 자네를 만나고 싶어서 이리 왔네.”
애신이 훅 치고 들어왔다. 애신이 한성지부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들어온 상태였지만, 이제는 동매가 뒷걸음칠 공간조차 남지 않았을 정도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도 무신회 건물까지 들어오시면 어떤 소문이 퍼질지 모릅니다.”
“괜찮네.”
동매는 애신의 평판을 떨어뜨리는 소문을 내는 자가 진고개에 보이면 반드시 다 잡아 족치겠다고 다짐하며 찻잔에 손을 가져갔다.
“소문이 소문으로 끝날지, 소문이 사실로 끝날지는 나도 자네도 모르는 일이니.”
동매가 거하게 사래에 걸렸다. 애신이 또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며 동매의 등을 두드려주려 자리에서 일어났고, 동매는 기침을 하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쳤다. 그러다가 두 사람의 손이 가볍게 닿았고 가벼운 웃음이 터졌다. 밝은 분위기를 이어가고 싶었지만, 밖에서 노려보는 함안댁 때문에 찻집에서 나올 수밖에 없었다.
***
밤 길/
미공사관에 스승님이 훔쳤던 총기를 돌려놓고 진고개 근방에 위치한 약방에 들렸다. 쪽방에서 환복을 하고 나와 보니 함안댁이 걸터앉아서 잠을 자고 있었다. 저 때문에 지쳐 잠든 함안댁을 깨우기 싫고, 혼자 걷고 싶어져서 장옷을 쓰고 조용히 약방을 나왔다. 목적지는 없으니 가볍게 한 바퀴를 돌기로 했다. 시간이 시간인지라 길거리에 사람이 적었다. 그 덕에 생각에 잠겨 걸을 수 있었다. 허나 몇 걸음 안가서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동매?”
“애기씨?”
익숙한 뒷모습이 뒤를 돌아보기도 전에 대답했다.
“어떻게 뒤돌아보기도 전에 나인 줄 알아본 게요?”
“그야. 한성에서 저를 쉽게 부를 여인은 몇 안 되서 말이지요.”
“나 말고도 더 있단 소리로군.”
“질투 하시는 겁니까?”
“그동안 받은 게 있다고, 이렇게 놀리는 겐가?”
애신이 입을 삐쭉 내밀었다. 인적 드문 밤길에 웃음이 피어났다. 저 멀리 유죠 일행이 동매에게 다가오다가 애신과 있는 모습을 보고는 멈춰 섰다. 동매가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자 길모퉁이로 몸을 숨겼다.
“이리 늦은 시간에 애기씨를 길에서 뵐 줄 몰랐습니다.”
“아. 함안댁과 함께 나왔는데, 잠시 나 혼자 길을 걷는 중이었네.”
“어느 쪽으로 가십니까? 함께 가드릴까 하여.”
“정처 없이 걷고 있었네만, 지금 보니 내 목적지는 자네였던 모양일세.”
애신이 또 한걸음 다가왔다.
“함께 걸어주겠는가?”
부드러운 고백이었다.
둘은 그렇게 한참을 함께 걸었다.
***
가마터2/
날이 좋았고. 동매가 보고 싶었다. 무턱대고 찾아갔다간 또 동매는 하던 일 제쳐두고 달려올 것 같았고, 함안댁은 난리를 칠 성 싶어서 서신을 쓰기로 했다. 한 글자 한 글자에 보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뭘 그리 정성스레 쓰십니꺼?”
“서신.”
“아범이 대감마님 심부름 받아가꼬 나간다고 하던데예. 보소! 잠시 와보시오!”
행랑아범이 함안댁의 부름에 달려왔다. 애신은 빠르게 서신을 끝내고 고이 접어 봉투에 담았다.
“어디로 보내면 됩니까요? 애기씨.”
“무신회의 구동매에게 전해주게.”
“예???”
애신의 입에서 뜻밖의 인물의 이름이 나오자 함안댁도 행랑아범도 놀라서 소리쳤다. 애신은 태연하게 서신이 담긴 봉투를 행랑아범에게 건넸다.
“그 백정 놈에게는 와예? 그 놈이랑 자주 만나는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죽것구만.”
“그렇게 부르지 말게. 이젠 나도 화를 낼 것이야.”
진심이 담긴 애신의 말에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관계를 인정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행랑아범은 애신의 서신을 받아들고 진고개로 향했다.
환복을 하고 짧은 휴식을 가진 후에 다시 동매에게 돌아갔다. 병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호타루의 상태가 안 좋아 보였다. 아까의 저를 보는 희성의 시선을 알 수 있었다.
“저 여인의 이름이 무엇이오?”
“호타루라고 합니다.”
“내가 호타루를 병실에서 내보낼 테니, 뭘 좀 먹이고 와주시오. 이러다가 환자가 늘겠소.”
병실에 들어가 바닥에 있는 잡기장과 세필 붓을 주워 호타루에게 건넸다.
“잠시 나갔다 오시오.”
호타루가 고개를 저었다.
“내가 그대에게 동매를 맡겼듯, 이번엔 내게 맡겨주시오. 호타루.”
애신이 제 이름을 부르자 호타루가 놀랬다. 잡기장과 세필붓을 받아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병실 문을 나서기 전에 애신을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그대의 사방이 적이 아니라 사방이 그대의 편이구려. 그러니 빨리 눈을 떠주시오.”
침대에 턱을 괴고 동매의 손을 잡았다.
*
날이 밝았다. 애신은 동매의 손을 잡고 잠이 들었고, 호타루는 동매의 곁에서 동매의 점괘를 보고 있었다. 뒤집은 3장의 카드가 모두 밝았다. 순간 동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을 뜬 애신과 호타루가 동매를 쳐다봤다. 동매가 깨어났다.
***
불안
애신이 퇴원 할 때까지 동매의 옆에 있으려고 했다. 언제 고사홍이 풀려날지 모른다고, 퇴원하면 바로 만나러 가겠다고 약조를 하며 애신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었는지 경무사와 우체사의 총판이 쏜살같이 찾아왔다. 찾아와서는 이완익이 요구한 전보를 건넸다. 그 전보에는 애신의 부모님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애신에게 이완익의 손이 닿기 시작했다. 애신을 돌려보낸 걸 후회하며 애신에게 찾아가려고 했지만, 몸도 성치 않을뿐더러 호타루가 붙잡았다. 애신에게 부탁을 받기도 했다니 더더욱 잡혀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퇴원하기 전에 애신에게 변고가 없기를 바라며 애신에게 애들을 보냈다.
*
장승구의 움막에서 이완익과 불길한 만남을 가진 후에 돌아가는 길이었다. 수풀 사이에서 수상한 움직임이 보였다.
“함안댁.”
“와예?”
“총포를 내게 넘기고 반대쪽으로 달리게.”
함안댁이 덜덜 떨며 총포를 넘겼다. 애신은 총포를 받아들자마자 수풀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저를 떳떳하지 못하고 저리 숨어서 지켜보는 자들이 호의적일 리가 없었다. 하지만 걱정과는 달리 동매의 낭인들이 천천히 수풀 사이에서 몸을 드러냈다.
“자네들이 왜... . 동매가 시켰군.”
낭인들이 얌전히 애신의 앞에 나왔다.
“말을 전하고 싶은데, 일어를 할 줄 몰라 큰일이네.”
“조선어를 할 줄 압니다.”
생각보다 조선어를 잘하는 덕분에 동매에게 말을 전해달라고 부탁할 수 있었다.
*
이완익이 애신을 만났다는 소식에 불안감이 커졌다. 이완익이 기다리던 전보는 제 손에 있으니 이완익의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어 버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가 조금은 아물어서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가 되니 이번에는 무신회 도장에 모리 타카시가 찾아왔다. 타카시에게 한 방 먹이고 밖으로 나와 애꿎은 벽에 화풀이를 하고 있었다.
“사람이 찾아왔습니다.”
“또 누가?”
저 멀리서 함안댁이 걸어왔다. 애신이 보냈을 리 없으니 고사홍이 보냈으리라 촉이 왔다. 고사홍의 방까지 가는 길에 주변을 샅샅이 둘러보며 애신을 찾아봤는데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애신 대신 다른 자를 마당에서 마주쳤다.
“어르신이 그쪽도 부르셨나보군.”
“오랜만에 뵙습니다. 나으리.”
“어느 쪽도 좋은 소리는 못들을 느낌이오.”
“그러게 말입니다.”
착잡한 심정으로 유진과 함께 고사홍의 방에 들어갔다가 변함없는 심정으로 나왔다. 품에 넣었던 땅문서를 꺼내 손에 쥐었다. 애신에게서 동전을, 고사홍에게서는 땅문서를 받았으니 이제는 정말 조선인이 되어야 하나 싶었다. 유진이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떴다. 혼자 남은 동매는 그저 가만히 서있었다.
“보소. 보소!”
함안댁이 장독대 뒤쪽에서 동매에게 손짓했다. 동매가 주변에 다른 이들이 없나 확인을 하곤 몸을 낮추며 다가갔다. 그리 시간이 많지 않다며, 문을 열 수는 없다며 광으로 안내하고 돌아갔다. 애신을 이렇게 가두고, 저는 저만치 치워두고, 고사홍에게서 고약함을 넘어 잔인함마저 느꼈다. 가만히 문 앞에 서있는데. 인기척이 들렸는지 안쪽에서 애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함안댁?”
“... ... .”
“행랑아범? 할아버님이 보냈는가?”
“... ... .”
문 앞의 그림자가 아무런 말이 없자 보고 싶은, 부르고 싶은 이름을 나즈막히 불렀다.
“구동매.”
“어찌 아시고.”
“그냥 불러보았소. 몸은 상처는 어떻소?”
“괜찮으니 이리 왔겠지요.”
“강한 척은 말고.”
“뵙고 싶어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애신의 웃음소리가 문틈 사이로 흘러나왔다. 둘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이 문이 너무나도 원망스러웠다.
“애들을 통해서 전달을 받긴 했지만, 조선말에 능통한 애들이 아니어서요.”
“아.”
짧은 침묵이 이어졌다.
“더는 나를 지켜주지 않아도 되오. 그러지 않는 게 그대에게도 좋을 테고. 나도 그대를 지키고 싶으니 부탁하는 거요.”
“... ... .”
“내가 직접 전해주고 싶어서 남겨둔 말이 더 있소.”
“듣고 있습니다.”
“그대와 걷는 길은 달라도 그 끝은 언제가 그대를 향할 거요.”
달빛이 조선과 동매를 지키고 싶은 애신과 애신을 지키고 싶은 동매를 비추었다.
***
짧은 이별
고사홍의 부고가 들려와 온 거리가 슬픔에 잠겼다. 동매는 차마 문상을 가지는 못하고 멀리서 조용하게 지켜보기만 했다. 고사홍은 저를 무슨 짓을 해서도 애신을 지킬 자로 여기며, 애신을 지켜달라는 거래인지 유언인지 알 수 없는 남기고 떠났다. 생의 마지막에 애신의 정인으로 남을지 애신을 지키는 자로 남을지 그 갈림길 사이에 서 있었다.
양반이든 가노든 상관없이 정말 모든 이들이 대문을 들락날락했다. 대부분은 고사홍에게 도움을 받은 자였으나 단 한 명, 고사홍에게 도움은커녕 미움과 분노를 산 이완익도 있었다. 이어서 임금이란 자까지 대문을 넘었다.
“누구든 다 받아주시나 봅니다. 허나 저는 안 되겠지요.”
노을이 져갈 때 즈음 고사홍의 상여가 대문 밖으로 나왔다. 다른 식솔들은 다 보이는데, 애신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걱정이 되는 마음도 잠시, 이완익이 사람들을 시켜 집을 폐허로 만들기 시작해 애신이 없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달려가서 막고 싶었지만 고사홍의 부탁과 애신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멀리서 지켜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
할아버님의 49재를 치루는 날이 되었다. 이를 모를 리 없는 일군들이 무조건 쳐들어 올 것이라 여기며 서둘러 동지들과 함께 제물포 절을 찾았다. 문중어른 대부분을 지키지 못했고, 동지들 일부를 잃었지만 저를 아껴주던 식솔들은 지켰다. 식솔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다시 한성으로 발을 옮겼다. 복수를 해야 하고, 전해줘야 할 물건도 있었다.
제빵소에서 사탕을 샀다. 오랜 시간동안 제 이름으로 달린 사탕을 받고, 동매의 이름으로 달아두기만 해서 그런지 뭔가 어색했다. 사탕 봉투 속에 동매가 무사하기를 저 없이도 무탈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득 담았다. 사탕과 동전 주머니를 소중히 들고 무신회 건물을 향했다. 사람이 있으면 다시 제빵소로 가서 동매 이름으로 달아둘 생각이었는데, 건물은 텅 비어있었다. 들키지 않아 다행이긴 하나 이렇게 비워져 있을 건물이 아니었다. 동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닌가 걱정이 들었다. 해가 지기를 기다릴 겸, 동매의 상태도 확인할 겸 도장에 물건을 두고 근처 찻집으로 향했다.
노을이 지고, 달이 얼굴을 내밀어도 동매는 보이지 않았다. 복수를 하는 건 잠시 미루고 동매를 찾으러 가야겠다고 다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순간 저 멀리서 동매와 동매의 낭인들이 보였다. 어디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지만 달빛이 비춰주는 얼굴은 많이 어두워 보였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인사를 하고 손을 잡고 싶지만 그렇게 하면 저도 동매도 손을 놓지 못할 게 뻔했다.
‘인사도 없이 가는 걸 이해해주시오. 그리고 부디 무사하시오.’
동매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찻집을 떠나 이완익의 집으로 향했다.
***
긴 이별
반년이 흘렀다. 사탕을, 애신을 본지도 반년이 지났다. 이정문이 납치된 소식을 전하고 애신과 함께 거닐던 곳을 걸었다. 진고개, 제빵소, 텅 빈 가마터 그리고 폐허가 된 애신네 집에 이어서 무신회 유도장을 향했다. 도장 입구에서 호타루를 마주쳤다. 땀 냄새가 독하다며 발도 딛지 않던 곳인데 너무 뜻밖이었다. 호타루가 동매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몸 뒤로 무언가를 숨겼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뭔데 그렇게 숨겨?”
호타루가 입을 앙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이러는 호타루의 모습이 낯설었다. 사적인 무언가가 있겠거니 하고 그냥 보내주었다. 마지막으로 글로리 호텔을 향했다. 호텔 뒷마당에서 히나를 만났고 호타루가 일본의 오야붕에게 전보를 보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제야 낯설던 호타루의 행동이 무슨 연유였는지 알아챘다. 곧바로 다시 진고개로 달렸다.
숨을 헐떡이며 방문을 열자 화들짝 놀란 호타루가 동매를 쳐다봤다. 호타루의 손에는 익숙한 봉투가 들려있었다. 동매가 다가가자 호타루가 손을 다시금 몸 뒤로 숨겼다. 호타루와 실랑이를 벌이다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붉은 색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그 사이로 서신이 보였다. 서신을 주워들고 호타루에게 칼을 겨눴다. 칼을 잡은 동매의 손도 떨렸고, 세필붓을 잡은 호타루의 손도 떨렸다.
*
일본으로 가는, 애신을 지키러 가는 배에 올랐다. 애신만 지키러 가는, 저는 죽으러가는 길이기도 했다. 품에 넣은 애신의 서신을 읽고 또 읽었다. 금방 돌아가겠다며 조금만 더 기다려달라는 짤막한 서신이었지만 접힌 서신 사이에는 다른 서류도 있었다. 저의 이름과 애신의 이름이 적힌 혼인 신고서였다. 이렇게 하면 얌전히 조선에서 기다려 주리라 믿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아도 위험한데, 호타루가 애신을 더욱 위험하게 만들었으니 조선에서 애신을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애신이 어디에 있을지 알 수 없으니 일본에 도착하면 바로 무신회에 찾아갈 예정이었다. 오야붕의 눈 밖에 난지 오래되었지만 간부 몇에게 칼을 겨눠 정보를 캐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희성과 히나의 도움으로 애신의 위치를 알게 되었다.
날이 어두워진 후에야 애신이 있다는 국숫집 근방에 도착했다. 오는 길에 인적도 등불도 하나 없어 불안한 기운이 감돌았는데, 저 멀리서 들리는 총소리가 그 불안이 현실임을 알려주었다. 허리춤의 칼을 꺼내들고 선술집 안으로 들어갔다.
칼날이 부딪히는 소리와 두세 번의 총소리가 들리자 국숫집에는 동매와 애신만이 두 다리로 서 있었다. 애신은 총포를 내려 가만히 동매만 쳐다봤다. 보고 싶던 얼굴이지만 일본에서 이렇게 만나리라 생각지 못했다. 동매가 천천히 걸어와 애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대가 왜 여기에 있는 거요?”
“칼을 뽑으러 왔습니다.”
애신이 동매의 손을 잡고 탁자를 넘었다. 밖에서 뜀박질 소리가 들려와 손을 놓고 다시금 총포와 칼을 들었다.
“애, 애기씨 갠찬슴니까?”
고였다. 바닥에 쓰러진 낭인들과 저를 향한 총포와 칼을 보고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애신과 동매는 총포와 칼을 내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일단 안전한 곳으로 피하시지요.”
동매가 애신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빠르게 옮겼고 그 뒤를 고가 따랐다. 동매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꾹꾹 참으며 동매의 손을 꽉 쥐었다.
*
도착한 곳은 희성의 동경 집이었다. 고가 기다리는 가족들에게 가야한다며 애신에게 작별을 고했다.
“오야붕, 애기씨를 부디 잘 지켜주시오. 그 손 절대로 놓지 말란 말입니다. 알았냐?”
동매가 애신과 잡은 손을 들어보였다. 고가 안심한 듯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동매가 혹시 모르니 주변을 둘러보겠다며 애신의 손을 놓았다. 동매를 잡으려고 손을 뻗었는데, 제 손에 피가 흥건했다. 그제서야 동매의 팔과 등의 상처가 눈에 들어왔다. 동매를 돌려세우고 소매를 걷어 올려 환부를 확인했다.
“저는-”
“괜찮다는 말마시오.”
애신이 동매의 말을 자르고 옆에 떨어진 천을 찢어 동매의 팔에 둘렀다.
“기다려달라고 서신까지 썼는데.”
“다른 이들에게는 전보를 보내셨더군요.”
“이리... 찾아올까봐 그랬소. 또 이렇게... 다칠...까봐.”
애신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리고 다른 이와 혼인신고서도 만드셨다고 들어서요.”
“아니 어떻게 그걸-”
“어떤 게 진짜인지 본인에게 확인받으러 왔습니다.”
“당연히 그대에게 보낸 게 진짜요.”
동매의 얄궂음에 애신이 천을 팽팽하게 당겨 매듭을 지었다. 동매가 낮게 신음소리를 내었다.
“내일 아침에 조선까지 무사히 데려다 줄 이들이 올 겁니다. 조선황제께서 보내셨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받는 구려.”
“조선이 애기씨께 받은 도움이 더 큽니다.”
“내가 그대에게 받은 도움이 더 크오. 그러니 일단 벗어보시오.”
“예?”
“뒤에도 다친 걸 똑똑히 보았소.”
“바닥에서 자란 지라 이 정도 상처는 익숙합니다.”
“벗으시오.”
애신의 단호한 명령에 동매가 웃옷을 벗기 시작했고, 애신이 천을 마저 찢었다. 동매의 등에는 피가 멎지 않은 상처뿐만 아니라 오래된 흉터들도 가득했다. 애신이 묵묵히 동매의 등에 천을 둘렀다.
“자주 다쳐야겠습니다. 이렇게 저를 먼저 벗기시니.”
“까불지 마시오. 그대에게 상처를 내는 이가 나일 수 있소.”
“그래도 상관은 없습니다.”
애신이 매듭을 짓고 동매의 등을 가볍게 쳤다. 동매가 신음 섞인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옷을 입었다.
“이제 정말 밖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여긴 안전할 거요. 그대가 그렇게 말했으니. 그러니 그냥 내 곁에 있어주시오.”
동매가 고개를 돌려 애신을 쳐다보자 애신이 동매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
날이 밝음을 알려주는 햇빛이 두 사람을 깨웠다. 상대방은 아직 자고 있겠거니 하고 서로의 몸에 팔을 둘렀다. 거의 동시에 움직이는 바람에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좋은 아침이오.”
“좋은 아침입니다.”
“그대와 맞이하는 아침은 두 번째인데, 아침인사는 처음이구려.”
“그 때는 누가 소리부터 지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지요.”
애신이 헛기침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동매는 누운 채로 주변에 던져진 옷을 주워 입는 애신을 바라봤다. 동매에게 있어서는 더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걸 알지 못하는 애신은 동매도 어서 일어나라며 호통을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보냈다는 사람이 찾아왔다. 건네받은 궁녀 옷에 애신이 지금의 상황을 알 수 없다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동매를 쳐다봤다.
“황제께서 보내셨다는 이들이 설마.”
“보빙사입니다. 궁녀로 이들을 따라 조선으로 돌아가시면 됩니다.”
“그대가 없는 조선으로 돌아가긴 싫소.”
“저도 곧 뒤따라가겠습니다.”
“정말이오? 정말?”
“예. 다른 이들에겐 몰라도 애기씨께 거짓을 고하진 않습니다.”
거짓말이었다. 동매는 거짓으로 애신을 안심시켰고, 애신이 조선으로 가는 배에 탈 때까지 거짓으로 애신을 안심시켰다. 애신은 배에 타기 직전에 본 동매의 눈빛에서 무언가 다름을 느꼈다. 동매는 그렇게 애신을 태운 배를 배웅하고 무신회의 낭인들을 맞이했다.
*
조선에 무사히 돌아온 애신은 일본에서 조선으로 들어오는 배편마다 동매를 찾았다. 하지만 동매는 그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고, 텅 빈 무신회 건물이 애신의 불안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동매는 그저 저를 무사히 조선으로 보내기 위해 일본에 왔었음을, 저만을 지키기 위해 왔었음을.
***
재회
애신을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3년, 그 긴 시간동안 동매는 무신회에 갇혀 있었다. 밉보이긴 했어도 아들로 인정했던 동매인지라 차마 죽일 수 없었던 오야붕이 내린 결정이었다.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던 어느 날, 항상 있던 보초 대신에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는 자가 나타났다.
“오야붕!”
고였다. 고의 손에는 열쇠가 들려있었다.
“정말 살아 계시군요! 갠찬냐?”
“왜 조선어로는 반말이냐?”
우연히 동매의 생사여부를 알게 되어, 황은산에게서 배워온 기술로 번 돈을 무신회 사람에게 찔러 넣었다고 했다. 정말로 도와주는 건 여기까지라며 동매를 조선으로 향하는 배에 태워줬다.
“나는 의병이 아닌데, 이렇게까지 해줄 이유가 있냐?”
“애기씨의 손 다시 잡으러 가시라고 이러는 겁니다. 약조 어기지 말라고.”
“...고맙다.”
고가 애써 웃으면서 동매를 배웅했다.
*
한성의 거리는 시체와 부상자들, 그리고 우는 자들로 가득했다. 이 중에 애신이 없기를 바라면서 모든 이들의 얼굴을 살피며 길을 걸었다. 그 길 끝에서 유진을 만났다. 짤막한 인사를 나누는 사이에 빈관이 있는 방향에서 총성이 들렸다. 동매는 유진과 함께 빈관으로 뛰었다. 빈관의 입구에서 맞이한 익숙한 두 얼굴도 잠시, 굉음과 함께 빈관이 폭발해 시야를 가렸다.
무너진 잔해들 사이에 애신의 옷자락이 보이자 동매가 애신을 부르짖으며 잔해를 파헤쳤다. 다행히도 애신에게는 맥이 있었다. 유진이 애신을 동매의 등에 업혔다.
“빈관 사장은 내게 맡기시오. 그 여인은 자네에게 부탁하겠소.”
“부디 무사 하십시오.”
동매는 그 길로 3년 전에 알아뒀던 의병들의 본거지를 향해 뛰었다. 가는 길에 분명 뒤에서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으나 칼소리와 함께 사라졌다.
본거지 근처에 다다르니 총포들이 동매를 겨눴다. 다행히도 보초를 서던 자들 중에 익숙한 자가 있었다.
“오야붕? 등에는 누굽니까? 애기씨? 애신 애기씨?”
제빵소 주인이 동매와 애신을 알아봤고, 동매를 처리하려는 다른 의병들을 뜯어말렸다. 그 덕분에 동매는 애신을 업은 채로 본거지까지 무사히 갈 수 있었다. 동매를 어떻게 믿냐며 반발하는 이들이 있었지만, 동매와 애신의 관계를 아는 함안댁과 행랑아범 그리고 황은산이 안심을 시키자 반발이 줄어들었다.
“자네가 살아있을 줄 몰랐네. 애신 애기씨를 이리 구해주니 고맙네.”
“나으리의 제자가 절 도왔습니다.”
“고? 그 놈이? 스승과 제자의 연을 끊은 지가 언젠데... ... .”
황은산은 유일무이한 그의 제자를 그간 고생하며 배운 기술로 가족들과 떵떵거리며 살라고 일본으로 보냈었다. 그의 바람과는 달리 아직도 그를 위해 고생하는 제자가 고맙고 안타까웠다. 동매가 감사인사는 고에게 하라며 다시 한성으로 돌아가려고 했다.
“어디 가지 말고 여기 있게.”
“제가 그래도 되겠습니까? 불안해하는 자들이 많던데.”
“오히려 자네가 돌아가면 일군에게 이 위치를 알리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이 거세질 걸세.”
어쩔 수 없이 황은산에게 잡혔다. 잠시 후에 함안댁이 애신의 치료가 끝났다며 동매를 불렀다.
*
몸을 뒤척이자 고통이 느껴졌다. 신음을 내며 눈을 뜨자 믿을 수 없는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통을 참으며 동매에게 몸을 움직여 팔을 뻗었다. 손이 동매의 얼굴에 닿자 동매가 눈을 떴다.
“정말. 정말 그대요? 그대가... 정말... .”
동매가 대답 대신에 애신을 와락 껴안았다. 두 눈에서 눈물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3년간 잊지 못해 미치도록 그리워하던 정인을 다시 제 품에 안았다. 죽은 줄 알았다며, 그렇게 저를 보내고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냐며 흐느끼는 애신을 그저 강하게 끌어안았다.
***
LAST
“자네는 이제 의병에 합류를 한 거요?”
“합류라기보다는 의병에 잡힌 겁니다. 제가 떠나면 더 불안해 할 거라더군요.”
“대장님이 그랬다면 믿을 수 있소.”
“믿으셔도 됩니다.”
“다시 돌아올 테니 이번에는 꼭 기다리시오.”
“예.”
상태를 회복한 애신이 이덕문을 처리하러 가기 전에 동매에게 기다리겠다는 약조를 받았다. 저를 배웅하는 함안댁과 행랑아범에게도 약조를 받았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겨우 옮겼다.
하지만 그 약조들은 하나도 지켜지지 않았다. 동매도 함안댁과 행랑아범도 애신과의 약조를 어겼다.
*
행랑아범과 함안댁을 포함한 몇몇의 의병들이 젊은 의병들을 구하기 위해 시간을 끌러 한성으로 떠났다. 소란스러운 와중에 동매도 떠나겠다며 황은산을 찾았다.
“제가 탈출한 걸 알아챈 무신회에서 사람들을 조선으로 보냈을 겁니다.”
“한둘을 보냈을 리가 없네. 차라리 계속 우리와 함께 있는 게 어떤가?”
“한둘이 아닌 자들을 저 혼자서 막겠습니다.”
“...애기씨께서 합류하시면 기차역으로 만주로 보낼 테니, 무사히 어디서든 만나길 바라겠네.”
“나으리도 그 곳에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
제물포항 한복판에 동매가 칼을 양 손에 쥐고 서 있었다. 가만히 서서 하늘을 보니 검은 새 한 마리가 저 멀리 날아가고 있었다. 애신을 저 멀리 날아가게 하기 위해 이미 한 번을 버린 목숨, 두 번이라고 못 버릴 이유가 없었다. 갓 도착한 배에서 승객들이 내려 동매를 피해 지나갔다. 이어서 무신회 낭인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오야붕께서 네 놈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셨다. 이렇게 마중을 나와 주니 고맙네.”
“나야말로. 이렇게 나를 찾아 조선까지 와주니 고마운데?”
수십 개의 칼이 동매를 겨눴다. 동매의 칼이 하나 둘 쓰러트릴 때 마다 동매의 몸에도 상처가 하나 둘 나기 시작했다. 낭인들의 피 인지 동매의 피 인지 알 수 없을 만큼 거리가 붉게 물들었다.
동매의 몸이 한계치를 뛰어 넘은지 오래, 땅에 꽂은 칼만이 동매의 몸을 지탱해줬다. 여기가 제 한계인가 싶은 순간, 저 뒤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오야붕!”
*
수개월 뒤 만주의 어느 산기슭에서 애신이 젊은 의병들을 교육하고 있었다. 애신의 명령을 따라 산 아래의 바위를 찍고 달려오는 의병들 뒤편으로 천천히 다리를 절며 걸어오는 이가 있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