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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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롤키

 

그것은 언뜻 비행으로, 비상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사지로의 추락을 작정한 자살 행위와 다르지 않음을 나는 모르지 않았다. 얼마나 남았는지 한 치 앞을 가늠할 수 없는 그의 서슬 퍼런 불꽃같은 생을 볼때 나는 우습게도 그는 죽기 위해 태어난 한 마리 무모하고도 냉혈한 짐승과 다를 바가 있는가 하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는 나와의 약조를 지키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는 제멋대로 이기적이고 나 따위는 안중에 없고, 어리석을 것이다. 이마에 닿았다 떨어지던 짧고도 의미심장한 그의 장난스러운 입맞춤은 다시 생각해도 그 자신이 내 말을 콧등으로도 듣지 않겠다는 무언의 신호 내지는 으름장과도 같았던 것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제 저녁이니, 야속한 시간은 참 더디게도 흐르고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한 그의 호강에 겨운 어여쁜 양반 계집은 몰골이 수척하여 과장을 좀 보태면 이대로 저자에 나가기라도 했다가는 상을 당했거나 심한 병중이거나, 이도 저도 아니라면 그녀의 정인이라는 소문이 파다한 어느 거칠고 사나운 천한 백정 출신의 칼잡이 사내로부터 버림을 받았다는 풍문이 한성 전체에 발 없는 말보다 빠르게 퍼져 나갈 것이 불 보듯 뻔하였다. 아무렴 어떠랴. 저승의 끝과 끝에서라도 알아볼 나의 하나뿐인, 참으로 못나고도 벅찬 붉은 기모노의 조선인 사내가 아직 몸 건강히 숨이 붙어 배로 수 일 거리라는 저 가깝고도 먼 땅을 종횡무진 활보하며 그 빌어먹게도 우아하고 잘난 칼질과 살육을 계속해 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한성의 어디를 가나 곳곳에서,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들려오는 불온한 격변의 조국을 나는 살아가고 있었고 이것으로 나의 생은 언제 어디서 그 끝을 맺든 미련 따위 없이 그저 복되고 다행일 따름인 것이었다.
-오라버니.
-왜.
-그 수장이란 자가 많이 무섭습니까. 일본에서 그 자를 대적할 이가 없을 정도라는 말씀이 사실입니까. 오라버니가 조선에 있는 날보다 일본에 머무는 날들이 많은 것도 다 오라버니가 그자의 사람이기 때문인 겁니까. 오라버니, 그리 웃지만 말고 대답을 해 주셔요. 예? 오라버니. 제발요.
-글쎄.. 수장이란 자가 무서운 것도 일본 땅에서 적어도 아직까진 그를 검으로써 대적할 이가 없는 것도 다 사실이긴 한데. 마지막 질문에 대한 답은.. 내가 지금 당장 주기는 좀 곤란할듯싶은데. 질문 자체에 다소 오류가 있는 듯도 싶고. 퍽 어렵네.
-왜요? 사실이 아니라서인거죠? 그렇죠?
-아니. 너 궁금하라고. 보류하는 건데.
-오라버니, 제발..
-하여간 욕심 많아. 어려운 질문을 한번에 세 개씩이나 그리 퍼부어 놓고, 이 중 두 개에 대한 답을 들었으면 나머지 하나는 나도 말을 잘 골라서 대답할 시간을 주는 게 단연 질문한 사람의 도리가 아니겠냐. 조금만 기다려. 나는 대장장이한테 다녀올게. 넌 그거 먹고 있어.
-싫어요! 같이 가요.
나의 사내, 나의 오라버니, 나의 유카타를 입은 지상에서 가장 멋지고 이상한 조선인 사내 구동매는 내게 기별할 짬조차 내지 못할 만큼 유난히도 분주하고 치열했다던 어느 봄날 그의 수장으로부터 '날아오를 상' 자가 들어가는 새 이름을 얻었다고 했다. 일본어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공부에 흥미가 없어 기본적인 한자의 부수와 획조차 곧잘 틀리거나 모르곤 하는 나를 아는 그는 멀뚱히 선 내 손을 끌어다 손바닥을 펴 잡고 그 위에 검지로 한 획 한 획을 신중히 그어 쓴 자신의 새 이름자인 '상' 자의 간지럽고도 낯선 감촉을 내게 새겨 보였다. 이 때 나의 기분이 어땠던가. 가슴이 불안하게 요동쳤던가.
-날 상 자야. 전혀 그렇게 안 보이지만 이 날카롭고 삐죽삐죽한 것들 두 개가 날개다. 이 웃기게 생긴 깃 우(羽) 자가 둘이면 날 상. 일본어로는 쇼 라고 읽어. 쇼. 이시다 쇼. 어떠냐? 네 입에는 좀 붙는 것 같아? 난 아직 영.. 어색하네.
그는 웃고 있었지만 나를 보고 있지 않았었다. 이번에야말로 확실했다. 나는 동요했었다. 아주 크게, 많이. 십수년도 더 지난 날의 찰나임에도 바로 어제 일처럼 무섭도록 선연한 그 날 그 순간의 멋쩍어하던 구동매와 적당히 따사롭던 공기의 냄새, 햇살이 그를 향해 쏟아지던 각도, 양옆과 뒤에서 왁자하던 외국인들의 떠드는 소리, 난생 처음 겪는 상실의 예감과 두려움의 무게에 짓눌려 떨던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의 작고 어린 가슴 같은 것들을 나는 저승까지 가져가 마지않을 것이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인지 열두 살의 고애신은 알지 못하였다-지금인들 자신 있게 안다 할 수 있을까-. 그러나 그 어리고 어리석은 양반 계집조차 당시의 순간에는 머리를 무엇에 강하게 후려쳐진 듯한 충격으로 단시에 알아차릴 수 있었을 만큼 그의 태도는 분명해 보였었다. 나의 창공을 뒤덮은 단 한 마리의 검은 새, 구동매는 날아오르려 하는구나. 생의 모든 순간을 통틀어 단 한 순간도 나의 것이었던 적 없는 가혹한 월중의 야차 구동매. 그는 아마 조선을 처음 떠나가던 까마득한, 임오년의 가을 초입 어느날 눅눅한 곰팡이가 슨 쉰밥을 집어 삼키며 멍투성이의 성치 않은 다리를 모아 안고 잠을 청하던 어느 여객선의 화물칸 구석에서부터 이미 아무도 몰래 숨이 턱에 닿는 가쁜 달음질을 시작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 달려서 닿고자 하는 곳이 어디인지, 왜 가려는지 따위를 나는 알지 못하고 알 수도 없다. 가끔 바라건대는 그가 차라리 돈이나 권력, 명예 따위의 재미없고 지극히 보통의 것들에 눈이 먼 평범한 부유한 살인업자 사내일 따름이었으면 하나 불행히도 나의 구동매는 몸이니 허리춤에 웬만한 사대부들의 자택 한 채를 두르고서도 진심으로 웃을 줄을 모르는 종잡을 수 없는 자였다. 오라버니, 좋으세요? 앞뒤와 전후 맥락의 많은 요소가 생략되어 불완전하지만 분명한 내 물음에 그는 늘 웃음으로 답했다. 그래 보여? 네가 그래 보인다면 그런 건가보지, 뭐. 그래. 좋다. 좋은 것 같다. 이러고 사는 거. 농인지 진심인지 모를 애매하고 실없는듯한 그 특유의 화법에 뼈가 있음을 모르지 않는 나는 늘 어렵고 불안했었다. 아예 시작조차 말았어야 했던 연인 것일까. 그와 나는. 잡배들에게 얻어맞는 그를, 운이 좋으면 하루에도 몇 번은 동선이 겹치던 낯설지만 애틋한 열 살배기의 이방인 소년 구동매를 지나치지 못하고 한 걸음이 멀다 하고 돌아본 일곱 살의 작은 계집 고애신. 원죄는 역시 할아버님의 꾸지람마따나 언제나 생각보다 행동이 앞서 될 일도 그르치곤 하는 어리고 무모한 그녀에게 있는 것인가 싶어 괴롭다가도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녀에게 감사한다. 사대부집 애기씨라는, 한때 구동매가 증오해마지않았던 호강에 겨운 일곱 자의 어여쁜 아픈 낙인을 나는 아주 오래 전의 구동매처럼 증오하면서도 동시에 사랑했고 사랑하며, 아마 죽기까지 사랑할 것이다. 늘 내가 양반가 애기씨가 아니었다면 으로 시작해 오라버니와 나는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었을텐데 로 마무리되는 형식을 고장난 기계마냥 끝도 없이 되풀이하던 어린 시절의 덧없는 망상은 그와의 끊어질듯 말듯 위태로우면서도 도타운 아이러니한 연의 끈을 십수 년이 넘게 이어오는 동안 내가 양반가 애기씨이기라도 했기에 로 시작해 그와의 초면에 미운 털이라도 박혀 어떻든 예까지 왔잖은가 로 끝나는 자조 섞인, 그러나 분명한 만족과 행복감마저 어린 안도와 자기 자신에 대한 도닥임으로 바뀌었다. 어른이 된 것일까. 방어일까. 마음의 준비일까. 셋 중 하나일 터였지만 이제 그런 것은 중요치 않았다. 돌아서거나, 나아가거나 스물일곱의 고애신이 닿을 곳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구동매가 나아가 닿을 곳이 어디인 줄은 알지 못해도 참으로 늦되나마 오래, 많이도 걸어 해진 꽃신에 한 손에는 잘려나간 머리칼을 들고 고애신이 나아가 닿을 곳은 하나였다. 끝끝내 나는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일지 몰랐으나 적어도 작고 어여쁜 가마에서 내려 무엇을 향해 나아가는 생의 기쁨을 넘치도록 누리는 호강에 겨워 매일 밤 한 치 여한을 남기지 않고 미소 지으며 눈 감는 참으로 복되고 운 좋은 양반 계집이었다. 구동매는 알까. 나를 진정 호강에 겨운 계집으로 살게 하는 것은 사대부집 애기씨라는 어여쁜 낙인도 밤낮으로 수발을 드는 가솔들도, 고운 비단으로 지은 의복도 한 때 허리까지 늘어뜨려 붉은 댕기를 매었던 숱 많고 결 고운 검은 머리칼도 아닌 오직 구동매 그 자신임을. 알기를 바라면서도 알지 않기를 바라다가도, 기어이 지옥 끝을 향한 추락같은 비상을 감행하려는 그의 두 날개가 되지는 못할지언정 하나뿐인 정인이라는 이름으로나마 그 거칠고 척박한 비상의 길-필경 추락의 길일 것을 모르지 않으나-에 함께일 수 있음에 감사하고 족했다. 나의 갇힌 겨울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피어난 한 송이 붉은 꽃 동매(冬梅)는 봄의 시작도, 겨울의 끝도, 그 무엇도 알리지 않은 채 오늘도 그저 제 피어난 자리를 뜨지 않고 태연히 지켜낼 따름이었으나 그 자체로 넘치게 향기롭고 아름다웠다. 두려울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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