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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전은 사랑을 싣고

W.사야님

@saayasandayo

 

 

 

 

 

 

 

늦은 밤, 고요하고 어둠 속에 녹아든 고가댁 안에서 작은사랑채만이 아직 노르스름한 촛불 빛으로 마당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곳의 주인인 애신은 여직 잠들지 못한 채 서안(書案) 앞에 앉아서 깊은 생각에 빠져있었다. 턱을 괴고 그녀가 손끝으로 만지작거리는 것은 다름 아닌 백동화 한 닢. 이 작은 동전이 무어라고 여인의 미간을 가득히 좁히고 잠 못 들게 만드는지. 애신은 동전을 하염없이 뒤집으며 몇 번째일지 모를 한숨만 세어간다.

애신은 동전에 얽힌 강렬한 기억들을 한시도 잊은 적이 없었다. 내리친 사내의 뺨과 원망을 가득히 품고 저를 노려보던 사내의 눈. 맞은 대가라도 원하는 양 내달 보름 직접 돈을 가지고 오라며 겁박을 하던 건방진 사내. 오라기에 찾아갔거늘 제 얼굴을 보고 귀신이라도 본 것 마냥 굴던 멍청한 얼굴. 돈주머니를 던져주자 돈을 보름마다 동전 한 닢씩 받겠다던 그 뻔뻔함과 지금 나를 평생 보겠다는 거냐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하던 오만방자함. 그런 사내의 태도에 심기가 불편하여 자네는 그 돈을 다 못 받지 싶다고 쏘아보았지만 낯짝이 두꺼운 사내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알고 보니 돈은 저를 만나기 위한 속이 빈 겁박이요, 얄궂은 수단에 불과했던 것을 알았을 때의 그 허무함이란. 애신은 약조를 지키기 위해서 다른 이에게 돈을 빌리려고까지 했기 때문에 더욱 어처구니가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할수록 열이 뻗쳐서 두 번째 보름에 동매의 유도장을 찾아갔을 때는 그의 면상에다가 동전을 던져주려고 했으나 차마 체면이 있어 애신은 그것을 꾹 참았다. 애신이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리고 내밀면 동매가 손을 뻗어 그것을 가져간다. 애신은 그가 동전을 집음과 동시에 홱 몸을 돌리고는 인사도 없이 빠르게 유도장을 나섰다.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든 어떤 반응을 보이든 그것은 애신에게 있어 전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가마에 오른 애신은 예까지 온 김에 눈깔사탕이라도 사먹을까 싶어 제빵소에 들렀다. 헌데 사탕을 고른 뒤 값을 치르려고 하니 제빵소 주인이 손사래를 치며 돈을 받지 않겠다고 하는 게 아닌가. 애신이 연유를 물으니 제빵소 주인은 서글서글 웃으며 이리 말하였다.

 

 

 

-오야붕이 애기씨께서 드시는 것은 모두 자기한테 달아두라고 하셨습니다.

 

 

 

제빵소 주인의 말에 애신은 기가 막혀서 헛웃음이 나왔다. 매달 동전을 받으니 그 대신이라는 것인가. 날로 발전하는 그의 발칙한 수작질에 애신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 내주고 싶다하니 원대로 해주어야지. 하여 애신은 그날 제빵소 야타이(屋台)에 진열되어 있던 사탕을 죄다 사서는 제빵소 안에 있는 객들과 가마꾼들에게 한 봉투씩 나누어 주었고 나머지는 가지고 와서 조씨 부인과 때마침 와있던 애순, 식솔들에게 나눠주었다. 사탕이 어찌나 많은지 그렇게 나눠주고도 봉투 하나가 남은지라 그것은 애신 자신이 먹기로 하였다. 오물오물 입 안을 가득 채우는 사탕이 금일은 더 달구나. 이 소식을 동매가 들으면 어찌 반응할지 생각만 해도 고소하여 애신은 세 번째 보름이 조금 기다려졌다.

그렇게 세 번째 보름이 되어 유도장에 찾아간 애신이 손바닥 위에 동전을 올리고 내밀자 어쩐 일인지 동매는 우두커니 서있기만 할 뿐 쉽사리 손을 뻗지 않았다.

 

 

 

-안 받고 뭐하는 겐가.

 

 

 

애신이 어서 가져가라는 듯 동전을 올린 손을 까딱이자 동매는 그제야 떨떠름하게 동전을 가져갔다.

 

 

 

-사탕을 많이 드시면 몸에 안 좋습니다 애기씨.

 

 

 

손가락 사이로 받은 동전을 굴리며 내뱉은 동매의 첫마디였다. 그 역시 제빵소 주인에게 소식을 들은 것이 틀림없었다. 애신은 무심코 웃음이 나올 뻔 했지만 진중함을 유지하며 한쪽 눈썹을 슬쩍 올려보였다.

 

 

 

-자네의 호의에 답을 한 것인데 아까운가보오.

 

-그런 것이 아니라….

 

-그럼 됐소.

 

 

 

무어라 변명을 하려는 동매의 말을 싹둑 자른 애신은 몸을 홱 돌려 앞으로 걸어갔다. 헌데 대련장 끝까지 걸어간 애신이 갑자기 멈추어 서더니 다시 동매 쪽으로 몸을 돌리는 게 아닌가. 지금껏 한 번도 돌아본 적 없었던 애신이 저를 돌아보자 동매는 눈을 꿈뻑이며 가만히 애신을 바라보았다.

 

 

 

-금일도 갈 거네.

 

 

 

그 한마디 남기고서 다시 도도하게 걸어 나가는 애신의 모습을 멀뚱멀뚱 쳐다보던 동매는 결국 크게 웃어버렸다. 그리고 그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애신 역시 따라서 웃고 말았다.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애신의 머릿속에 미운 사내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기 시작한 것도, 불편했던 사내가 불편하지 않게 된 것도, 보름이 멀게 느껴지고 늦은 밤까지 잠 못 들게 된 것도. 애신은 처음에는 마음에 거스러미가 생긴 줄로만 알았다. 떼어버리려니 아릿하여 저절로 떨어지도록 기다렸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그대로 자리를 잡아버린 것 같았다. 거북함은 간지러움으로 바뀌고 무관심이 그리움이 되자 그제야 애신은 자신이 동매에게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정신이 나간게지. 미친게야….

 

 

 

이십구 년 살면서 처음으로 마음을 준 자가 다른 이도 아닌 구동매라니. 자고로 사람 마음이란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다고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나. 하여 애신은 밤마다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동매의 나쁜 점을 떠올리고 그가 저에게 한 짓들을 되뇌었다. 호강에 겨운 양반 계집이라는 말에 가슴이 시큰거리고 붙잡힌 치맛자락에 심장이 쿵 한다. 다리에 맞은 총탄을 생각하면 속에서 불길이 솟아올라 애신은 동전을 든 손을 꽉 쥐어야했다. 허나 그다음 떠오르는 것은 가마 안에서 보았던 백정 소년의 눈물이요, 백 번을 돌아서도 이 길 하나뿐이라는 가여운 변절자의 토로, 애기씨를 잘 보는 새끼가 있으면 눈깔을 뽑아버릴 거라는 사나운 고백이었다. 매 보름마다 유도장에서 저가 오기를 기다리던 동매의 모습이 그려지자 굳어있던 몸에 힘이 쭉 풀렸고 꽉 쥐고 있던 손도 스르르 펼쳐졌다.

지금에 와서 돌아보면 갑작스레 찾아온 연심은 아니었다. 저를 향해 저돌적으로 돌진하다가도 금세 겁을 먹고 뒷걸음질 치는 사내를 보았을 때부터 이미 은근하게 머무르고 있었을 것이다. 행동은 거칠고 어투는 무례하나 그 눈빛만은 달랐다. 감추려고 애를 쓰지만 결코 숨기지 못하던 연모에 젖은 눈동자. 열망해 마지않고 갈망하다 못해 스스로를 헤칠 지경에 이른 동매의 연정이 오직 자신에게 쏟아지고 있음을 애신이 모를 리 없었다. 애신의 손안에 몸을 뉘이고 있던 동전은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서안 위로 미끄러졌고 얕게 파도치다가 결국 제자리를 찾는 그것이 꼭 제 마음과 같아서 애신은 잠들기 전 마지막 한숨을 내쉬었다.

 

 

네 번째 보름, 가마를 타고 동매가 기다리는 유도장으로 향하는 애신은 전과 다르게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서 죽을 맛이었다. 꼭 쉬지 않고 산을 올랐을 때처럼 호흡을 해도 불편함이 남아있어 몇 번씩 들이마셨다가 내쉬어야 했다. 잠깐 들어갔다가 동전만 주고 나오는 것이다. 벌써 몇 차례 걸음을 하였거늘 어찌하여 금일은 이리도 긴장이 되는 게야. 애신은 가마가 유도장 앞에 도착한 뒤에도 쉽사리 내리지 못하였다. 행여 함안댁이 저를 재촉할까 싶어 오늘은 식솔도 대동하지 않고 왔다. 그렇게 한참을 가마 안에 앉아있던 애신은 깊게 숨을 내쉰 후 단단히 결심을 하고는 가마 창을 내다보았다.

 

 

 

-가마 문을 열게.

 

 

 

애신의 말에 가마꾼 중 하나가 가마 문을 열고 안으로 손을 내밀자 애신은 괜찮다며 스스로 가마에서 내린 후 유도장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갔다. 유도장 안으로 들어가 신을 벗고 복도를 걷자 주변이 어찌나 고요한지 애신은 행여 제 심장 소리가 밖에까지 들릴까 걱정이 되었다. 짧은 복도가 끝나자 장지문으로 둘러싸여 하얀 햇살이 그대로 들어오는 대련장이 나왔고 그 대련장 맨 끝에 여느 때처럼 동매가 애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 달 올 때마다 하얀색 유도복을 입고 있던 동매였으나 오늘은 평소에 입는 왜인 복장을 하고 있었다. 그와 눈을 마주한 순간 곤두서있던 긴장감은 어디가고 애신은 가슴 속 깊이 편안함을 느꼈다. 터질 것 같았던 심장도 가라앉았고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도 아래로 내려왔다. 사뿐사뿐 다다미를 밟으며 동매에게로 걸어가는 애신은 그날 처음으로 그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지금까지는 얼른 동전을 주고 가고 싶은 마음에 신경조차 써본 적 없었던 동매의 얼굴은 예까지 오는 동안 한참 긴장하였던 제 낯꽃과 비슷해보였다. 애신이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걸어오자 동매는 마른 침을 한 번 삼키고는 먼저 시선을 내리깔았고 꼭 그와의 작은 신경전에서 이긴 듯한 기분이 들어 우쭐한 애신은 보일 듯 말 듯 미소를 지었다. 동매의 앞까지 다다른 애신이 품에서 동전을 꺼내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린다. 동매는 그녀의 행동 하나라도 놓칠 새라 눈도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가만히 애신의 손을 따라서 시선을 움직였다. 이윽고 애신이 동전을 올린 손바닥을 그에게 내밀자 동매는 손을 뻗어 엄지와 검지로 그 동전을 가져간다. 동매의 굵은 손가락이 동전을 집기 위해 애신의 하얀 손바닥을 스치는 찰나, 대련장 안에서는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동매의 손이 제 손을 벗어나서야 애신은 조용히 숨을 내쉬었고 동매는 제 손을 완전히 거두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둘은 잠시 그대로 선 채 가만히 있었다. 언제나 동전이 손에서 떠나고 나면 쏜살같이 가버리던 애신이 오늘은 그러지 않아서 동매는 기뻤다. 하여 약간의 기대를 품고 동전을 손바닥 안으로 꽉 쥔 동매가 애신에게 먼저 말을 건넸다.

 

 

 

-오늘도 사탕 드시러 가십니까.

 

-갈까 생각 중이다만, 그건 왜 묻소.

 

-소인도 오늘은 사탕을 사먹으러 갈 것이라 혹 가는 길이 같으면…….

 

 

 

주절주절 희망 사항을 늘어놓던 동매는 애신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 저를 쳐다보는 것을 보자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애신의 눈길에 따라서 당황한 것인지 동매 역시 애신을 바라보며 눈을 크게 두어 번 꿈뻑거렸다. 그렇게 서로를 쳐다보며 눈만 깜빡이던 둘은 잠시 후 동매의 말뜻을 이해한 애신이 아, 하고 짧게 탄성을 내뱉고서야 서로에게서 꽂혀있던 시선을 거둘 수가 있었다. 애신은 무어라 대답을 하려다가 이내 말보다 먼저 뒤를 돌기로 했다.

 

 

 

-좋을 대로 하시오.

 

 

 

대답을 끝내자마자 쏜살같이 걸어 나가는 애신의 뒷모습을 보며 동매는 씩 웃고는 그녀를 따라서 유도장 밖으로 나왔다. 반가 여식이 타고 다니는 가마 옆에 붙어서 걷는 낭인의 모습은 지나가는 이들의 눈길을 사로잡았으나 그 낭인이 동매임을 알고는 서둘러 시선을 내리깔고 자리를 피했다. 동매는 걷는 내내 웃음이 멈추질 않는지 연신 싱글벙글이었고 가마 안에 있는 애신 역시 기분이 꽤나 좋아보였다. 얼어두었던 가마 창밖으로 슬쩍 시선을 줄 때마다 곁에서 걷는 동매의 걸음걸이가 보여서 애신은 피식 웃음이 났다. 이윽고 제빵소 앞에 당도하였는지 가마가 멈추었고 애신이 가마를 내리라고 일렀다. 그러자 가마 창 너머로 동매의 다리가 앞으로 걸어 나가는 것이 보여서 애신은 그가 사탕을 사오는 줄 알았건만 아무래도 그것이 아닌 듯 했다.

닫혀있던 가마 문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가마 문이 열려 놀란 애신이 문 쪽을 쳐다보자 그녀의 시야에 검은 하카마와 붉은색 기모노가 들어왔다. 그리고 완전히 열린 가마 문 아래로 허리를 숙인 동매가 안에 있는 애신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애신은 그 모든 순간이 마치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소리도, 냄새도, 모든 감각이 멎고 이 세상에 저가 타고 있는 가마와 그 가마 문을 열고 저에게 손을 내밀고 있는 동매만이 존재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애신의 세상이 동매로 물드는 순간이었다. 손을 뻗은 동매가 웃자 다시 세상이 움직였고 시끄러운 저자 소음이 돌아왔다. 멍하니 앉아있다가 정신을 차린 애신은 서둘러 동매의 손을 잡고 가마 밖으로 나왔다. 애신이 처음 잡은 동매의 손은 따뜻했고 동매가 처음 잡은 애신의 손은 보드라웠다. 하여 금방 떨어지고 마는 손이 많이 아쉬웠다. 괜스레 어색한 기분이 들어 둘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얼른 제빵소 앞으로 갔다. 동매는 신중한 눈길로 사탕을 고르는 애신을 신기하다는 듯이 쳐다보았고 고민 끝에 드디어 사탕 하나를 고른 애신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흰 종이 위에 그것을 올려두었다.

 

 

 

-다 똑같은 것이 아닌지요.

 

 

 

동매가 애신을 따라 사탕을 뒤적거리며 묻자 애신은 무슨 그런 소리를 하냐는 양 한껏 좁힌 미간으로 동매를 다그쳤다.

 

 

 

-다르오. 이렇게 각이 진 것은 먹으면 입 안이 아프단 말이오.

 

 

 

애신은 앞에 진열된 빨간 사탕 중 하나를 검지로 가리키며 동매에게 설명을 해주었지만 동매 눈에는 영 그것이 그것이었다. 동매가 팔짱을 끼고 사탕을 내려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자 애신은 자신이 고른 것 다음으로 표면이 맨질맨질하고 동그란 사탕 하나를 골라서 동매에게 내밀었다.

 

 

 

-이렇게 뾰족한 부분이 없는 것이 가장 맛있소.

 

 

 

얼떨결에 애신이 건넨 사탕을 받아든 동매는 그녀가 저에게 뭔가를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애신을 쳐다보았다. 애신은 옆에서 그가 저를 쳐다보든 말든 커다란 사탕을 입 안에 가득 넣고는 요리조리 굴리다가 배시시 웃었다. 그 웃음에 동매는 힘이 쭉 풀리고 온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예 있는 사탕을 죄다 먹는다 한들 애신의 미소보다 더 달콤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동매는 그리 믿어 의심치 않았다. 동매가 계속 저를 쳐다보며 바보처럼 웃을 뿐 통 사탕을 먹지 않자 이상하게 여긴 애신은 입에 물고 있던 사탕을 잠시 입 밖으로 빼냈다.

 

 

 

-안 먹고 뭐하시오?

 

-아.

 

 

 

그제야 여직 사탕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동매가 서둘러 사탕을 입에 넣었고 그가 한쪽 볼을 부풀린 뒤에야 애신은 다시 사탕을 입 안에 넣었다. 애신과 동매는 서로 많은 대화를 나누지 않아도 그저 곁에 서서 같은 것을 먹는 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즐거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가져가시지요.

 

 

 

사탕을 다 먹은 애신이 가마에 오르기 전, 동매는 사탕이 가득 든 종이봉투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많이 먹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찌나 꽉꽉 채워 넣었는지 자칫하다가는 넘칠 지경인 종이봉투를 보며 애신이 장난스레 묻자 동매는 피식 웃었다.

 

 

 

-제가 드리는 것은 예외입니다.

 

 

 

다 같은 사탕이거늘 저가 주는 것은 다르다니, 동매의 당돌한 대답이 재미가 있는지 애신 역시 따라서 웃고 말았다.

 

 

 

-그럼 다음 보름에 뵙겠습니다. 애기씨.

 

-알겠네.

 

 

 

동매는 애신을 태운 가마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자리에 서서 한참을 바라보았고 애신은 고가댁으로 돌아가는 가마 안에서 손에 든 종이봉투를 만지작거리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다섯 번째 보름까지는 많은 일이 있었다. 혼인을 서두르겠다는 조씨 부인의 말에 애신은 드디어 칼을 뽑아들었다. 사홍에게 혼인할 수 없다고 선언한 애신은 사랑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버틸 요량이었다. 이로 인해 병이 나든 집안에서 쫓겨나든 다 상관없다고, 모든 것을 버려야한다면 버리겠다고 독하게 마음먹었다. 삼일 내내 무릎을 꿇고 앉아 잠도 자지 않고 버티는 애신을 바라보며 식솔들은 저러다가 정말 일이 날까봐 속이 문드러졌다. 하루하루 지나갈수록 눈앞이 노래지고 어질증이 와도 애신은 독하게 버텼다. 언젠가는 이리 될 일이었다. 제 말에 집안이 뒤집히게 될 줄 알았으나 그렇다고 해서 원하지도 않는 혼인을 할 수는 없었다. 하여 애신은 굳게 닫힌 사홍의 사랑채 앞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다. 애신의 동무이자 정혼자인 희성은 착한 사내였다. 하여 저가 일본에서 십 년 동안이나 돌아오지 않은 것에 대한 죗값이 파혼임을 잘 알고 있었기에, 결국 그가 애신을 위해서 나서게 되었다. 희성이 스스로 혼인을 파하겠다고 움직여준 덕에 몇 달은 족히 끌게 될 줄 알았던 애신과 사홍의 싸움은 7일 만에 끝을 보았다. 조씨 부인이 희성의 모(母)인 호선을 만나 정혼을 완전히 정리하였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애신은 흙바닥에 쓰러져서 사흘 내내 잠만 잤고 제대로 움직일 수 있게 될 때까지는 나흘이 더 걸렸다. 애기씨 때문에 살 수가 없다는 함안댁의 하소연에 애신은 야윈 얼굴로 그래도 쫓겨나지는 않았으니 되지 않았냐고 농을 쳤다가 밤새 함안댁에게 잔소리만 들었다.

다음 날, 다섯 번째 보름이 되어 애신은 가마에 올랐다. 아직 움직여서는 안 된다는 함안댁의 만류에도 애신은 꼭 가야할 곳이 있다며 기어이 유도장으로 향했다. 유도장 앞에 당도하여 가마를 내리자 지나가던 행인들이 애신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수군거렸다. 이미 고가댁 애기씨와 김가댁 삼대독자의 파혼 소식은 한성 바닥을 뜨겁게 달구었기 때문에 밖을 나서면 모든 이들의 시선이 저를 향할 것임을 애신 역시 뻔히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동매를 만나러 가는 길을 택하였다. 함안댁에게는 예서 기다리라고 이른 후 애신은 홀로 유도장 안으로 들어갔다. 신을 벗고 복도를 걷자 어쩐지 울음이 터질 것 같기도 하고 속이 울렁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지금까지 잘 참았거늘 애신은 동매를 마주한다고 생각하자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결국 애신은 걸음을 멈추고 한 번 숨을 깊게 삼킨 후에야 다시 앞으로 향할 수 있었다. 대련장 앞에 당도하자 초조하게 같은 곳을 왔다갔다 거리고 있던 동매가 발을 멈추고 애신을 쳐다보았다. 못 본 사이 동매 얼굴이 퍽 야윈 듯하여 애신은 그보다 더 야윈 제 몸 생각은 않고 그를 더 걱정하였다. 대련장 안은 애신이 사박사박 다다미를 밟으며 걸어오는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렸다.

 

 

 

-저자에 온통 애기씨 얘기로 가득합니다. 이런 흉, 저런 흠.

 

 

 

제 앞에 멈춰선 애신을 마주한 동매가 가장 먼저 꺼낸 말이었다. 사람 속을 뒤집을 속셈인지, 아니면 빙 돌려 건네는 걱정인지 다른 이가 듣는다면 구분할 수 없겠지만 애신은 저를 바라보는 동매의 눈에 아픔이 가득한 것을 알기에, 그가 제 소식을 듣고 얼마나 마음을 썼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런가.

 

 

 

짧게 대답한 애신은 동전 하나를 꺼내어 손바닥 위에 올린 후 그에게 내밀었다.

 

 

 

-이번 달 치일세.

 

 

 

걱정이 가득한 눈으로 애신을 바라보던 동매가 동전을 향해 손을 뻗었고 그의 손가락이 제 손바닥을 스칠 때, 애신은 그 손을 잡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멀어지는 손을 멈춰 세우고 잠시라도 좋으니 그 온기에 위로 받고 싶었다. 허나 애신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떠나는 손을 가만히 응시하다가 시선을 떨어뜨렸다.

 

 

 

-그럼.

 

-애기씨.

 

 

 

무거운 마음으로 돌아서려는 애신을 동매의 음성이 붙잡는다. 애신이 반쯤 돌다가 멈추고 동매를 쳐다보자 그는 어디서 난 것인지 어느새 종이봉투 하나를 손에 들고 있었다.

 

 

 

-사탕…드시겠습니까.

 

 

 

식솔이 기다리고 있으니 가봐야 한다고 말하려던 애신은 그의 손을 보는 순간 반쯤 열었던 입을 다시 닫았다. 사탕 봉투를 든 손끝도, 건네던 말끝도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닿을 수 없는 이에게 조금이라도 힘이 되어주고 싶어 쥐어짜낸 동매의 용기였다. 그것을 모른 체하기에는 애신은 이미 동매를 마음에 품고 말았다. 애신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동매는 그녀를 단상으로 안내했다. 동매는 평소에는 저가 앉는 곳에 애신을 앉혔고 자신은 애신의 치마가 닿지 않을 만큼 떨어져서 다다미 바닥에 앉았다. 동매가 건넨 종이봉투에서 사탕 하나를 꺼낸 애신이 그것을 입 안에 넣고는 남은 봉투를 그에게 돌려주었고 동매 역시 안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어 입 안에 넣었다. 크고 단단한 눈깔사탕이 다 녹을 때까지 그 오랜 시간 동안 둘은 아무 말도 나누지 않고 그저 함께 앉아있었다.

 

 

 

-자네는 혼인을 하였소?

 

 

 

사탕을 다 먹었을 즘 애신이 갑작스레 동매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녀가 저에게 질문을 했다는 사실에도, 그 질문 내용에도 놀란 동매는 토끼 눈을 하고 애신을 쳐다보았다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직 입니다.

 

-그럼 혼인 생각은 있소?

 

-애기씨는 어떠신지요.

 

 

 

정혼을 파한 이에게 보통 그런 질문은 삼가지 않나. 애신이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동매를 쳐다보니 그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다다미에 눈금이 몇 개인지 세고 있었다. 동매의 질문에 큰 의미는 없어보였다. 아니면 저에게 보여주지 않는 얼굴 속에 무언가를 감추고 있던가. 어느 쪽이든 애신은 상관없었다. 답은 같았으니.

 

 

 

-나는 없소.

 

-그럼 저도 없습니다.

 

 

 

굳이 "그럼"이라는 말을 덧붙이는 불순한 사내의 불순한 대답에 결국 애신이 웃어버렸다. 애신의 웃음소리에 고개를 든 동매는 그녀가 왜 웃는 것인지 의아해보였지만 애신의 기분이 나아졌다면 그걸로 된 게 아니냐며 저도 따라서 슬쩍 웃었다. 슬슬 밖에서 기다리는 함안댁의 참을성도 한계에 다다를 듯하여 애신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애신이 일어나자 동매도 따라서 일어났다. 그리고 대련장을 나서기 전, 애신은 품에서 동전 하나를 더 꺼내어 동매에게 내주었다.

 

 

 

-사탕 값이네.

 

 

 

가게를 통째로 털어갈 때는 언제고 새삼 사탕 값을 치루는 애신의 모순적인 태도가 재미있어 동매의 한쪽 입꼬리가 또 올라갔다.

 

 

 

-이리 미리 주시는 걸 보니 아무래도 제가 다음 달에는 돈을 받지 못하나 봅니다.

 

 

 

동매의 농에 애신은 숨소리를 섞어서 옅게 웃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애신이 저가 건넨 농을 받아주자 동매는 퍽 기분이 좋아졌다. 기분이 좋으면 사람은 때로는 앞뒤 생각하지 않고 행동을 하는 법. 동매 또한 그러하였다. 동매는 받은 동전을 소매 안에 넣은 뒤 손을 뻗어 애신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 그녀의 손바닥 위에 사탕이 든 종이봉투를 올려주었다.

 

 

 

-값을 치르셨으니 가져가서 드십시오. 다른 이는 주지 마시고 혼자 다 드셔야 합니다.

 

 

 

몸에 안 좋다고 할 때는 언제고 자꾸 먹이지 못하여 안달인 동매가 우습고도 재미있어 유도장 밖으로 나온 애신은 들어가기 전과 달리 낯꽃이 훤히 펴있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기에 그리 기분이 좋아 보이는지 함안댁은 그것이 궁금하여 입이 근질거렸지만 굳이 물어보지는 않고 서둘러 가마를 출발시켰다. 고가댁으로 돌아가는 길, 애신은 가마 창을 열고 바람을 쐬었다. 처음 동매의 유도장을 찾았을 때는 날이 아직 더웠거늘 어느새 쌀쌀해진 날씨가 지나온 시간을 짐작하게 했다. 눈만 마주쳐도 서로 날을 세우고 싸우던 사내와 사탕을 주고받는 사이가 될 줄이야. 인생사란 참으로 기이하도다. 애신은 동매가 쥐어준 종이봉투에서 사탕 하나를 꺼내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각진 곳 하나 없이 보름달처럼 동글동글한 것이 그가 얼마나 고심하여 골랐는지 잘 알 수 있었다. 험악한 사내가 제빵소 앞에 서서 사탕을 하나하나 정성스레 고르는 모습을 상상하자 애신은 또 웃음이 나왔다. 모든 일이 다 잘 풀릴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동매가 저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동매 본인 다음으로 잘 아는 애신이기에 다음 보름에는 그를 조금 놀라게 해줄까 하는 즐거운 상상까지 하고는 했다.

허나 세상사가 그리 잘 풀리기만 할 리 있나. 동매와 만나고 사흘이 지난 밤, 애신은 함안댁에게서 엄청난 소식을 듣게 되었다. 진고개에서 대낮에 총소리가 울려퍼졌다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여러 번. 행인들의 말에 의하면 구동매가 이끄는 무신회가 가두를 지나던 중 총에 맞았다고 하는데 어떤 이는 구동매가 총에 맞아 쓰러지는 것을 보았다고 하고 다른 이는 구동매가 아닌 다른 낭인이 맞았다는 둥 사람마다 말이 다르다고 했다. 잠자리에 누우려던 차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은 애신은 넋이 나간 사람마냥 이부자리 위에 멍청하게 앉아있었다. 바로 며칠 전에 본 사내가 총에 맞았다고? 쓰러졌다고? 씩 웃던 동매의 얼굴이 여직 제 눈에 선하거늘 애신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라고, 그럴 리 없다는 부정과 만일 그렇다면, 혹 그 말이 사실이라면 하는 걱정 때문에 애신은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불행의 전조 같은 것들이 애신의 뇌리를 스쳐지나갔다. 처음 자신이 유도장을 찾아갔을 때 그에게 쏘아붙였던 그 말, 자네는 그 돈을 다 받지 못 하지 싶다던 가시 돋친 비수와 며칠 전 동매가 농 삼아 자신에게 건넸던 말이.

 

 

 

「아무래도 제가 다음 달에는 돈을 받지 못하나 봅니다.」

 

 

 

그 순간 애신은 심장이 곤두박질치고 으스러지는 듯하여 가슴을 부여잡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숨이 쉬어지질 않아 애신은 이를 악물고 목 안으로 신음을 터뜨렸다. 온몸이 벌벌 떨리고 겁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확인해야했다. 동매가 무사한지. 다쳤으면 얼마나 다쳤는지. 죽었는지 살았는지. 당장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으면 정말로 정신을 놓아버릴 것 같았다. 애신은 벌떡 일어나서 허겁지겁 옷을 차려입었다. 양장이 있었으면 가장 좋았겠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었다. 손이 떨려서 고름이 제대로 묶이지를 않는지라 애신은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겨우겨우 고름을 다 메고 방에서 나오자 주변은 어두컴컴했다. 벌써 자시(子時)가 다 되었기 때문에 집안은 고요했고 돌아다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양장 차림도 아니고 반가 여식 차림으로 늦은 밤 저자를 나섰다가 누가 보기라도 하면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닐 것이다. 허나 지금 애신에게는 그보다도 동매의 안위가 더 중했기에 당혜를 신고 마당으로 내려와 단숨에 돌담을 뛰어 넘었다. 지나다니는 이 하나 없는 길 한복판을 홀로 달려가는 애신은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였다. 진고개 거처로 가야하나, 아니면 서양식 병원에 가봐야 하나. 하지만 애신의 발이 향하는 곳은 바로 유도장이었다. 이유는 모르나 그곳에 가면 동매를 만날 수 있을 것 같다는 직감만을 믿고 애신은 계속 달렸다. 그러다가 돌부리에 걸리는 바람에 당혜 한 짝이 벗겨졌지만 그래도 애신은 멈추지 않았다. 신이야 나중에 찾으면 된다고. 없으면 맨발로 가면 된다고. 애신은 동매가 아닌 다른 걱정은 죄다 나중으로 미뤄버렸다.

헐떡이며 유도장 앞까지 당도한 애신은 숨이 턱까지 차올라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것 같았지만 계속해서 움직였다. 한쪽 신을 신은 채로 안으로 들어가 비틀거리며 복도를 지났다. 동매가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을 품고 대련장 앞에 멈추자 거짓말처럼 그곳에 동매가 앉아있는 게 아닌가. 단상에 걸터앉아 동전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동매는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애신의 모습에 놀라서 들고 있던 동전을 떨어뜨렸다. 동매가 엉거주춤 일어나서 무어라 말을 하기도 전에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온 애신은 여직 숨을 헐떡이며 그의 몸을 이리저리 살폈다.

 

 

 

-애, 애기씨?

 

 

 

애신이 이리 늦은 시각에 말도 없이 저를 찾아왔다는 사실에도 놀라서 쓰러질 지경인데 다짜고짜 여기저기 더듬으며 제 몸을 살피는 그녀의 행동에 동매는 대관절 이게 무슨 난리인가 싶어 일단 애신을 진정시키기 위해 손을 뻗어 그녀의 양팔을 붙잡았다.

 

 

 

-애기씨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러시는 겁니까.

 

 

 

걱정스러운 동매의 물음에 설움이 북받친 애신의 눈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혔고 통 말은 하지 않고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제 얼굴만 들여다보는 애신 때문에 동매는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허나 일단은 그녀를 달래는 것이 먼저라고 판단하여 나가서 찬물이라도 떠오려고 했으나 애신이 그의 소매를 붙들어 가지 못하게 했다. 가쁘게 몰아쉬던 숨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가라앉아 제대로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애신은 동매의 애간장을 다 태운 후에야 늦은 밤 예까지 찾아온 연유를 입에 담을 수 있었다.

 

 

 

-자네가…자네가 진고개에서 총을 맞았다는 얘기를 들어서…그래서….

 

 

 

애신의 말에 순간 동매는 그녀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여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러다가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올랐는지 아-하고 길게 소리를 내고는 애신을 안심시키기 위해서 웃어보였다.

 

 

 

-수하 놈 둘이 총을 맞긴 했으나 소인은 맞지 않았습니다.

 

 

 

동매의 말에 곧 죽을 것 같았던 애신의 얼굴에 겨우겨우 화색이 돌았다. 정말이냐고, 참이냐고 애신이 몇 번이나 되묻기에 동매는 제 소매를 걷어서 팔을 보여주었고 기모노까지 젖혀서 가슴과 복부에 붕대를 감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런 동매의 행동에 깜짝 놀란 애신이 몸을 홱 돌리고서야 지금 자신이 그녀를 앞에 두고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은 동매는 또 한 번 아 소리를 내며 서둘러 옷을 단정히 하였다. 동매가 다시 의복을 갖춘 후에야 다시 몸을 돌려 그를 마주한 애신은 검지로 뺨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제 시선을 피하는 동매를 보고서야 진심으로 안도했다. 휘몰아치던 마음이 안정을 찾자 그 다음에는 민망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오는지라 이번에는 애신은 동매의 눈을 쳐다볼 수 없게 되었다. 애신은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무사하다니 되었소. 그럼 가보겠소,

 

 

 

애신이 허겁지겁 돌아가려고 발길을 돌리자 동매는 느리게 팔짱을 끼며 애신의 치맛자락을 내려다보고는 한마디 턱 내뱉었다.

 

 

 

-신을 한 짝만 신으시고 어딜 가시겠다는 겁니까.

 

 

 

보지 않았기를 바랐건만 눈썰미 좋은 동매가 그것을 못 볼 리가 없었다. 애신은 작게 혀를 차고는 밍기적밍기적 다시 동매 쪽으로 몸을 돌렸다.

 

 

 

-거 사람이 모르는 척 하는 것도 예의란 것을 모르오?

 

 

 

괜히 민망하여 툴툴거리는 애신과는 반대로 동매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닌 듯 했다. 애신이 이렇게 한달음에 달려와 준 것은 평생토록 가슴에 품을 기쁨이기는 하였으나 이러다가 애신이 어딜 다치기라도 하면, 혹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하면 동매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발은 괜찮으십니까.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동매의 물음에 무심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발을 살펴보는 애신의 눈을 따라 동매의 시선도 애신의 발로 향했다. 신은 없고 버선만 있는 한쪽 발에 흙이 가득 묻어 있는 것을 보자 사내의 마음은 자갈밭이 되었다. 동매는 어깨까지 들썩일 정도로 한숨을 푹 쉬고는 애신에게 등을 보이더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업히십시오.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제정신이오? 알아서 가겠소.

 

 

동매의 말에 기겁을 한 애신이 한걸음 뒤로 물러섰지만 동매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발이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마음 편히 날지도 못하게 되실 겁니다.

 

 

 

애신이 검은 새가 되어 지붕 위를 나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은 아니었으나 그녀가 다친 채로 나는 것보다는 몸 성히 날아오르는 것이 더 나았다. 하여 애신이 거부할 수 없도록 동매는 일부러 그리 언급을 한 것이다. 결국 애신은 동매의 등에 업히게 되었고 그녀를 가뿐하게 업은 동매는 자리에서 일어나 게다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고요한 밤길을 걷는 동매의 걸음은 경쾌했다. 처음에야 기쁨보다 걱정이 더 컸지만 이리 애신을 업고 밖을 걷고 있으니 새삼 꿈만 같아서 자꾸만 웃음이 나고 기분이 좋았다.

 

 

 

-뭐가 그리 좋소?

 

 

 

동매의 등에 업힌 애신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자 귀 가까이서 들리는 그녀의 목소리에 동매는 가슴이 간질간질하여 또 웃었다.

 

 

 

-애기씨께서 소인 걱정을 이리 해주시는 줄 꿈에도 몰랐습니다.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는 동매가 꼭 저를 놀리는 것 같아서 애신은 그만하라며 동매의 목에 두른 팔에 힘을 주었지만 한 번 뚫린 사내의 입은 멈출 생각을 않았다.

 

 

 

-아무래도 보름에 한 번이 아니라 주에 한 번씩 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애기씨가 또 이렇게 달려오지 않도록.

 

-어허, 작작 하시오.

 

-아니면 소인이 매일 애기씨를 뵈러 갈까요.

 

-이자가 정말 따끔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리지…!

 

 

 

안 그래도 부끄러워서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구만 제 마음도 모르고 자꾸만 농을 치는 동매가 원망스러워 애신은 몸이 미끄러지지 않도록 한쪽 손으로 그의 기모노를 꽉 잡은 후 다른 손으로 냅다 그의 뺨을 잡아당겼다.

 

 

 

-말로 할 때 그만 하시오.

 

 

 

애신이 겁박하듯 으름장을 두며 뺨을 꼬집어도 동매는 그것마저 좋은지 또 한 번 크게 웃었다.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 된 가을밤은 그렇게 오래오래 두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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