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달래꽃 질 무렵
-글쓴이. 테리우스
“러브가 뭔지 아시오? ̊̈”
“알아야 합니까.”
“..... 사랑이라 합니다. 러어-브으.”
애신이 말꼬리를 늘어트리자 두 귀가 붉게 물든 동매였다.
“그.... 그런 거 안 키웁니다.”
평소와는 좀 보기 드문 동매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말투에 애신은 동매를 놀릴 생각에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그런 애신에도 동매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다. 동매에게 ‘사랑’은 어떻게 그리 낯간지러운 단어가 아닐 수야 없었다. 두 볼이 연한 핑크빛으로 물들고 심장이 간절했으며 숨 쉬는 것조차 불편하게 만드는. 세상에서 제일 힘들고 고달픈 병. 그게 사랑이라 생각했으니까.
애신은 눈동자가 곧 파국 상태가 될 듯 심하게 흔들리는 동매를 보고는 겨우 참고 있던 웃음을 그만 터트리고 말았다. 푸핫-
“사랑은 키우는 게 아니라.”
“.....”
“보이지도 않고 만질 수도 없는 아주아주.”
위험하고 도발적인 행동이지요.
애신이 눈썹 한 쪽을 지켜 올리며 능글맞게 웃었다. 지금 이 상황을 살펴보면 분명 두 사람이 함께 있지만 전혀 상반 대는 표정과 행동이 드러남을 알 수 있었다. 애신은 그저 즐기고 있는 것 같았지만 그와 반대로 동매는...
“참, 귀여운 면도 있네그려.”
“...... 무슨.”
애신의 농담에 동매의 얼굴은 붉다 못해 터질 것만 같은 지경에 이르렀다. 아̆̈. 동매는 느꼈다. 지금 자신의 심장이 간지럽고 숨쉬기가 힘들었으며 얼굴이 뜨끈한 것이 그 사랑이라는 병에 걸려버린 것을.
지독하고도 고통스러운.
차라리 자신의 왼쪽배에 총알을 한 번 더 박히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한 동 매였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과 애신은 애초에 태생부터가 천지 차이가 났으니. 애신이 5살 때. 그러니까 이제 막 한글을 떼고 있을 때 동매가 애신에게 나타났다. 외동딸로 태어나 귀하게 자라야 할 애신의 호위무사로.
애신이 대대손손 유명한 가문의 귀한 외동딸이었다면 반대로 동매는 산적 아빠와 미천한 출신의 제대로 된 이름 하나 없는 엄마 사이에 태어난 아이였다. 팩트로 날리자면 보잘 것도 없는 출신이었다. 어딜 가나 무시당하고 손가락질 받기가 일상이었던 동매는, 제대로 된 집 하나 얻어 가져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며 구걸하며 하루를 마지막처럼 겨우겨우 살아갔다.
정말 이 날이 마지막이겠구나 싶던 1월 초. 영하 기온으로 내려간 날씨 덕에 동네 아무 마구간에서 벌벌 떨던 동매를 발견한 애신의 외할아비였다. 끽해야 자신의 손녀와 3살 위로 보일까 말까 한 그 가엾은 소년을 거둔 것이었다.
그렇게 평생 머리카락 한 올 서로 맞닿을 수 있을까 했던 희박한 인연으로 동매와 애신이 만나게 되었다.
***
동매는 애신의,
“그대가 보기엔 누가 꽃인 것 같소? ̊̈”
티끌 하나 없는 맑음을 좋아했다.
“누가 봐도 저 진달래가 꽃입니다.”
“..... 자넨 여자 마음을 전혀 몰라.”
“별말씀을요.”
이런. 애신은 동매를 째려보며 내키지 않는 듯 입맛을 쩝 하고 다셨다. 그리고선 고개를 획 돌려 빠른 걸음으로 앞서나가는 애신이었다. 그런 애신을 보며 동매는 남몰래 웃음을 내었다. 비록 표현하는 법이 아직까진 서툴지라도 마음만큼은 못 숨기는 타입의 순정남 동매. 동매는 손을 뻗어 예쁘게 핀 진달래꽃 한 송이를 땄다.
“예쁘긴 하네.”
물론 우리 아가씨보단 못하겠지만.
진달래꽃을 부드럽게 손에 쥔 동매는 걸음을 서둘리 하여 저만치 앞선 애신의 뒤를 따라갔다. 동매는 늘 그래왔다. 자신의 위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는 절대 애신을 앞서지도 그렇다고 옆에 함께 거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며 지킬뿐.
그런 동매가 답답하고 싫었던 애신은 몇 번 명령 아닌 명령도 했었다. 단호하고 칼 같은 동매의 거절에 금방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애신은 동매와 자신이 조금이라도 더 특별하고 가까워졌으면 했다. 지금 함께 걷고 있는 이 길에서 자신과 동매의 보폭도 포함해서 말이다. 물론 그건 동매도 매한가지였다.
동매는 뭐가 그리도 겁이 나는 걸까.
아직 철이 들려면 참이고 먼 천방지축 애신을 곁에서 지켜야만 하는 동매의 역할. 동매는 그 선 이상을 넘기가 무서웠다. 자신이 해를 볼까 두려웠던 것은 아니었다. 저에겐 더 이상 잃을 게 없으니. 그럼 무엇이냐고? ̊̈
자신이 아닌 애신이 가지고 있는 커다랗고 값진 것들이 한순간 저 때문에 무너져 버릴까 봐. 애신의 저 따스한 미소와 활약이 되는 작은 몸 짓 하나하나를 더 이상은 못 보게 되어버릴까 봐.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이 한순간 무너져 버리는다는 것이. 그게 동매를 괴롭혔던 것이다.
유명한 가문의 손녀가 미천한 출신의 뭣 도 없는 자신과 서로 연모를 하는 사이라는 게 퍼지 기라도 하면? ̊̈ 그 누가 저 둘 사이를 반겨줄 것인가. 동매는 제 자신의 처지가 이토록 비참했던 순간이 없었다.
“구! 동! 매!!!”
“.... 네? 아가씨?”
언제부터 멍을 때리고 있었던 걸까. 언제부터 아가씨가 자신의 앞에서 제 이름 석 자를 소리쳤던 것일까. 동매의 흐릿했던 눈동자에 초점이 맞춰지고 정신이 반짝 든 동매는 제 앞에서 입을 삐죽이고 있는 애신을 봤다.
“귀신에라도 홀린 것인가?”
“아닙니다.”
“그럼 영혼이 잠시 산책이라도 하고 오든?”
“죄송합니다 아가씨.”
동매가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사과를 청하자 애신의 입에서 바람 빠진 소리가 났다. 어째 농담과 진담을 구별할 줄 모르는 것일까. 농이었네. 애신의 말에 동매가 숙였던 허리를 곧게 폈다.
“농인 거 알고 있었습니다.”
“.....”
동매의 말에 애신은 자신의 버릇인 입 삐죽이기를 하며 몸을 획 돌렸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이번엔 꾀나 단단히 삐진 것 같아 보였다. 또 한 번 저만치 앞서간 애신에 동매는 웃음을 터트렸다. 이때까지 살아오면서 자신을 웃게 해준 사람은 애신 밖에 없다는 것을. 동매는 또 한 번 다짐했다.
자긴의 평생을 애신에게 바치겠다고.
***
"아가씨 어서 일어나세요."
"으음..."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 동매가 급한 마음으로 서둘러 애신을 깨웠다. 동매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에서 깬 애신은 아직 채 다 뜨지도 못한 눈으로 동매를 쳐다봤다.
"무슨 일인데..."
"반란입니다."
동매의 말에 깜짝 놀란 애신은 눈을 크게 떴다. 뭐라고?
"폭군이 쳐들어 왔어요. 빨리 도망가야 합니다 아가씨."
"아..."
"서둘러야 해요. 다른 사람들은 이미 다 도망간 상태입니다."
"넌?"
"전 아가씨가 먼저이니까요."
말을 마친 동매는 애신의 손을 잡고 자리에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그때,
쾅-
애신과 동매가 있는 곳에서부터 얼마 떨어져 있지 않는 곳에서 강한 소음이 들렸다. 아 이런. 동매는 탄식했다. 이젠 별수가 없었다. 발걸음 만이 두 사람이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
"아기씨 잠시만 실례 좀 하겠습니다."
"......?"
동매는 허리를 숙여 애신을 옆으로 안아 올렸다. 동매의 행동에 애신은 자연스레 동매의 목에 손을 둘렀다. 애신이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동매를 쳐다봤지만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쓸 상황이 아니었다. 동매는 자세를 바로하고 걸음을 빨리했다. 뒷마당에 다다랐을 때였다.
"윽-"
"구 동 매!!!"
애신의 소리침과 동시에 동매가 그 자리에 배를 부여잡고 주저앉았다. 그의 왼쪽 배에 붉은 피가 새어 나와 옷을 금세 적셨다. 아... 고통스러움에 동매가 눈을 찡그렸다. 아가씨...
"어서 빨리 도망가셔야 합니다."
"싫네. 너 없인 안 갈 거야."
"아가씨.... 아니,"
애신아.
동매가 흐릿한 눈빛으로 애신을 바라봤다. 제 앞에서 어느새 눈물을 흘리는 애신을 보며 동매는 쓴웃음을 지었다. 첫 만났을 때는 그저 말괄량이 꼬마 아이일 줄만 알았는데, 벌써 어엿한 숙녀가 되어 제 앞에 있는 애신에 동매는 지난 애신과 함께 했던 날들을 떠올렸다. 좋았는데. 좋았어. 그리고 좋아한다.
어느새 피는 동매가 주저앉은 자리까지 침범하여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지금 상황으로 동매를 챙기기엔 애신이 너무 위험했다. 서두르지 않으면 폭군이 이 둘을 찾을 것이었다. 위험했다. 어서 빨리 애신을 지켜야 하는 마음이 급급한 동매는 남은 힘을 끌어올려 애신을 힘껏 밀었다.
"가."
"싫...."
"제발! 가주라 애신아..."
동매의 간절한 불음에 애신의 두 눈동자가 흔들렸다. 애신은 몸을 움찔하더니 망설였다. 여기서 너를 두고 가면... 어떡하라고.
"나보단 네가 먼저야."
"....."
"아 그리고."
동매는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주머니에서 다 시든 진달래꽃을 애신에게 건네었다.
"주고 싶어서. 예쁘잖아."
"...... 아 진짜...."
"물론 네가."
애신의 눈물이 그녀의 얼굴을 흠뻑 적셨다. 동매는 손을 올려 애신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동매는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말하는 건데 있잖아."
"....."
"네가 말한 러브라는 것. 내가 널 보며 느끼는 그런 말인 것 같아."
"....."
"사랑한다고."
"....."
늦게 말해서 미안.
동매의 눈이 서서히 잠기고 있었다. 안돼 눈떠 구 동 매!!! 애신의 소리침에도 동매는 반응하지 못했다. 애신은 동매를 끌어안고는 울음을 토해냈다. 아... 제발.... 눈 좀 떠봐....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진달래꽃 한 송이가. 꽃잎이 다 떨어져 버려 이파리 밖에 남지 않은 그 진달래꽃 한 송이가. 동매를 떠올리게 했다.
동매의 마지막 소원 하나가 있다면...
애신의 옆에서 나란히 서서 걷는 것이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