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김희성이 고백했다며?”
어깨 한쪽으로 탐스럽게 내려온 세팅된 머리를 뒤로 넘기며 의자에 앉은 여자가 애신에게 말을 걸었다. 애신은 뒤에서 불쑥 들려온 소리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었다.
“양화 왔구나, 근데 어떻게 알았어? 너는 진짜 모르는 게 없네….”
“한성대에서 내가 모르는 가십이 어딨어. 다 내 손바닥 안이지”
양화라 불린 여자가 어깨를 으쓱이며 애신의 어깨를 토닥였다. 입술을 잘근 거리며 근심 어린 표정을 짓고 있는 애신을 빤히 바라보던 양화가 슬쩍 핸드폰을 애신의 앞에 들이밀었다.
“…뭐든지 해드립니다? 1건당 10만 원부터. 장기 업무는 보름마다 30만 원…?”
“돈이면 다 해준다는 한성대 최고 핫플 구동매를 모르는 네가 난 신기하다.”
학교 커뮤니티 같은 것도 좀 보라며 혀를 차는 양화의 말은 애신에게 이미 들리지 않았다. 애신은 양화가 보여준 화면만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글을 읽고 또 읽을 뿐이었다.
<Love Fiction>
무더웠던 여름이 지나고 어느덧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는 가을이 왔다. 애신은 가디건을 여미며 바닥에 떨어져 쌓인 낙엽들을 발로 툭툭 찼다. 애신의 취향과는 오백만 년은 떨어진 김희성이 고백한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이양화가 알려준 소스로 구동매에게 접근해서 의뢰를 맡긴 지 벌써 오늘로 딱 2주가 되는 날이었다.
양화가 보여준 글을 보고 애신이 동매에게 카톡으로 문의를 보내자 체육관으로 오라는 답이 왔다. 애신은 모 아니면 도라는 심정으로 수업이 끝나자마자 나는 듯 뛰어서 체육관으로 갔다. 유도복을 입은 남자들이 우르르 애신을 지나 밖으로 빠져나갔고 그 끝엔 누군가 정좌 자세로 매트 위에 앉아 있었다.
“…고애신 선배님.”
애신은 저를 단번에 알아맞힌 동매를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위아래로 훑었다. 앉아있음에도 얼마나 장신일지 느껴지는 커다랗고 단단해 보이는 체격이었다. 바위 같은 몸에 걸맞게 무뚝뚝해 보이는 인상까지 어딘가 위험한 느낌을 풀풀 풍기는 남자였다. 애신의 의뭉스러운 눈초리에 동매가 여상스레 말을 꺼냈다.
“선배님을 모르는 사람도 있답니까, 퍽 유명인이신데.”
전 국무총리의 손녀로 입학 당시부터 떠들썩했던 애신을 한성대에서 모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 사실을 상기시키며 동매는 자리에서 일어서 애신의 앞에 섰다. 애신이 한참이나 작아 동매가 꽤 시선을 내려야 겨우 애신과 눈을 맞출 수 있었다.
“긴말하지 않을게. 구동매 네가 한 달 동안 내 남자친구 좀 해야겠어.”
“이유는?”
“돈만 주면 뭐든지 한다는 사람이 이유도 묻네.”
“골치 아픈 일엔 휘말리기 싫어서 말이죠. 아쉬운 건 선배 쪽일 텐데 꽤 공격적이십니다, 고애신 선배님.”
금방이라도 자신을 지나쳐 체육관 밖으로 나가버릴 것 같은 동매의 말투에 아차 싶은 애신이 한숨을 크게 쉬었다. 김희성이 자신에게 고백한 일과 그냥 거절하기엔 집안끼리 얽혀있어 껄끄러운 사정을 설명하자니 괜한 소문이 돌까 걱정됐다. 하지만 동매의 말대로 아쉬운 건 애신이었다.
“경영에 김희성이라고 있는데, 걔가 고백을 했어. 그런데 집안끼리 얽힌게 있어서 거절의 사유가 뚜렷해야 하고. 그래서 네 도움이 필요해.”
“남자친구 노릇 하면서 김희성이란 놈을 떨궈내달라?”
애신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초조해지는 마음을 애써 다잡으며 동매의 대답을 기다렸다. 내내 읽을 수 없는 무뚝뚝한 낯을 하고 있던 동매가 씨익 웃었다
“좋아요, 대신 보름마다 직접 이리 오셔서 갚을 치르셔야 하는 조건입니다. 계좌이체 같은 건 사절입니다.”
동매의 호쾌하게 올라간 입꼬리가 일자로 꾹 다물려있던 얼굴보다 잘 어울렸다. 이렇게 동매와 애신은 가짜 연애를 시작하게 된 참이었다.
애신은 발길질로 애꿎은 낙엽더미를 와르르 무너트리며 지난날의 회상을 마쳤다. 그날 이후로 계약을 한 동매와는 매일 시간이 맞을 때마다 만나 보란 듯이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소문이 나야 했고 김희성과 직접 마주치면 더욱 좋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동매를 만나기 위해 그의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고 있었다. 한성대가 자랑하는 캠퍼스의 벚꽃길 끝에 위치한 교양대 건물 앞은 여기저기 모여 떠들고 있는 학생들로 가득했다. 얜 도대체 언제 나오는 거야, 하며 핸드폰을 확인하려는 애신의 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죄송합니다. 꽉 채워서 수업하는 교수님 수업이라.”
언제 왔는지 기척도 없이 나타난 동매가 애신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로. 가자 밥 먹으러.”
“뭐 드시겠습니까? 제가 사겠습니다. 고애신 선배님.”
“일하는 중인데 네가 왜 사, 내가 사야지. 그리고 그 선배님 소리 좀 그만둘 수 없어? 낯간지러워.”
“네, 선배님”
애신은 능글맞게 웃는 동매를 째려보았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뻔뻔하게 굴던 동매가 애신의 손을 가져와 자신의 손안에 가두듯 잡았다. 마디마디가 굵은 남자답게 큰 손에 잡힌 애신의 희고 작은 손이 뚜렷하게 상반돼 보였다.
자신의 손을 잡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동매를 따르며 애신은 생각했다. 구동매 손이 참, 따뜻하다고. 진짜 여자친구한테는 어떻게 굴까,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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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여기서 이러고 먹는 게 최선이었을까 싶은데.”
“12시 반, 점심시간. 게다가 경영대 채플 시간 전이라 김희성이 지나갈 확률도 높으니 최선이고 최상입니다.”
자신의 숟가락 위에 돈까스를 얹어주는 동매를 보며 애신은 물만 들이켰다. 후문에 있는 샌드위치 가게나 가자던 애신의 말에 동매는 더 좋은 생각이 있다며 도시락 가게로 데리고 갔다. 가장 비싼 도시락 2개를 주문한 동매(계산은 우기고 우겨 그가 하였다.)는 다시 애신을 경영대 앞 벤치와 테이블들이 있는 작은 공원으로 데리고 왔다.
동매의 말대로 점심시간이라 지나가는 사람도 많았지만, 그들처럼 둘러앉아 도시락이나 샌드위치 따위를 먹고 있는 사람도 많았다. 애신은 특히나 ‘김희성이 지나갈 확률’에 스스로 납득을 시키며 생수병을 내려놓고 젓가락질을 시작했다.
“…그런데 구동매, 나 돈까스 안 좋아하는데 그만 해.”
“…돈까스 좋아하시지 않습니까?”
“내가 그렇게 말한 적 있어? 너한테 내 음식의 기호성에 대해 말한 자체가 없는 것 같은데.”
밥을 먹는 내내 애신의 그릇 위로 제 몫의 돈까스를 집어 올려주던 동매의 젓가락질이 허공에서 멈췄다. 웬일인지 당황한듯한 동매의 얼굴을 보며 애신은 새삼스러워졌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남자가 저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해서 어딘가 귀여워도 보이고 자신보다 어린 게 맞긴 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야, 왜 그렇게 당황해. 다른 사람이랑 착각했나 보지.”
“그런가 봅니다. 지난 고객이 돈까스광이었나 봅니다.”
“그래, 나는 아니니까 이거 다 너 먹어.”
애신이 탑처럼 쌓아놓은 돈까스를 죄다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주자 주인되는 자가 갑자기 입을 벌리고 애신을 쳐다봤다. 애신이 멀뚱멀뚱 쳐다만 보고 있자 동매가 눈짓을 했다.
“설마, 먹여달라고?”
끄덕끄덕.
“진심으로?”
끄덕끄덕.
낯간지러움에 소름이 돋는 기분이 든 애신은 젓가락을 밥에 꼽고 도리질을 쳤다. 절대 못 한다며 입 다물라고 말하려는 찰나 이 상황의 원흉인 김희성이 친구들에게 둘러싸여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비엔나 소세지 하나를 급하게 집은 애신이 눈을 질끈 감고 동매의 입을 향해 젓가락을 뻗었다.
“…먹여주는 사람이 눈을 감다니 신선하네요.”
조준에 실패한 소세지는 동매의 입술 옆에 붙었다가 케첩 흔적을 남기며 주르륵 흘러내려 테이블로 떨어졌다. 헉, 하고 황급히 휴지를 들은 애신은 동매의 뺨을 닦았다. 벅벅 소리가 날 정도로 거센 손길이었다.
“…뺨을 닦아주는 사람치곤 설거지하는 사람 같기도 하고.”
벌게진 동매의 뺨을 보며 애신은 멋쩍게 웃었다. 가족인 할아버지에게도 애교 있는 손녀가 되지 못하는 애신으로선 누군가에게 뭔가를 먹여주는 것은 큰 용기가 필요한 행동이었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애신과 그런 애신을 턱을 괴고 바라보고 있는 동매의 곁에 누군가 다가왔다.
“애신아! 어, 동매도 있었네.”
항상 우르르 같이 다니는 무리들은 어디다 두고 혼자인 김희성이 그들에게 반갑게 인사했다. 저 해맑은 얼굴은 김희성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어, 안녕…?”
“안녕. 오늘도 예쁘다 애신아.”
“가시던 길이나 가시죠, 선배님.”
“동매 너는 오늘도 화가 났구나. 그리고 내가 가던 길이 여기였는데?”
씩 웃으며 동매의 등을 두들기는 희성을 질색하며 뿌리친 동매가 도시락 뚜껑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그리고 애신의 짐을 대신 챙기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1초라도 더 빨리 이 자리를 뜨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였다. 김희성과 단독으로 마주한 이 좋은 기회에 다정한 연인 연기는 커녕 자리를 뜨기에 급급해 보이는 동매에 당황한 애신은 테이블 밑으로 동매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갑자기 얻어맞은 동매는 급하게 고개를 들었다.
“하하하. 내 남자친구한테 왜 그래. 하하. 화가 난 게 아니라 원래 얘는 그렇게 생긴 거야. 그렇지 동매야?”
아무 말도 없이 희성만을 노려보고 있는 동매에 애신이 다시 발길질했지만 꿈적도 하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는 듯한 기분이 든 애신은 손부채질을 하며 덥지 않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아, 애신아. 내일 나랑 영화 볼래? 미스터 선샤인머스캣 시사회 티켓이 생겼는데 같이 가자.”
“나랑? 아, 내가 내일….”
“애신 선배가 왜 당신이랑 영화를 봅니까? 남자친구가 이렇게 버젓이 옆에 앉아있는데.”
아무 말도 없이 입 다물고 희성만 노려보던 동매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당황해서 입만 벙긋거리던 애신이 손뼉을 치며 웃었다.
“아 맞아! 맞아, 희성아 나 남자친구 있잖아. 하하하.”
한결같이 작위적인 웃음소리에 희성이 큰소리로 웃다가 애신과 동매를 한번 씩 번갈아 보다가 다시 첫 등장처럼 동매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가는 건 아니잖아.”
“진짜 가시던 길이나 곱게 쳐 가시죠, 임자 있는 사람한테 기어들어 오지 마시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위협적으로 희성을 내려다보며 밖으로 몰아내는 몸짓에 무슨 사단이라도 날까 싶은 애신이 동매의 후드 자락을 끌어당겼다.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애신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동매가 애신의 손을 낚아채 들어 올렸다. 사람 좋은 웃음만 여전히 짓고 있는 희성을 보며 동매는 애신의 손등에 입 맞췄다. 쪽, 소리에 애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쪽, 쪽. 손등에 여러 번 입 맞추며 자신을 노려보는 동매에 희성은 결국 알았다며 미안하단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떠나야 했다. 희성이 떠나고도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붙들고 있는 동매에 애신은 눈만 껌뻑였다. 손등에 닿은 입술이 남자라기엔 보드랍고 말캉했다. 감촉을 되새기자 애신의 심장이 갑자기 미친 듯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혹시나 심장소리가 들릴까 당황한 애신이 황급히 자신의 손을 잡고있는 동매의 손을 뿌리쳤다.
“워, 원래 이렇게 까지 적극적으로 일하나 봐?”
“…애인 해달라고 돈을 받으면 애인이 되고, 사람 때려달라고 돈을 주면 깡패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너, 사람 때려주고 그런 건 안 한다던데?! 미쳤어?”
경악스러운 목소리로 버럭 소리를 지르며 어느새 자신에게 바싹 붙는 애신의 몸짓에 흠칫하며 동매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애신의 손등에 연신 입 맞추던 사람이라 하기엔 무색하게 어색한 뒷걸음질이었다.
“내일이 딱 보름입니다. 12시까지 체육관으로 오시는 거 잊지 마십시오. “
고개만 꾸벅이며 인사한 동매가 큰 보폭으로 걸어 사라졌다. 애신은 손등을 매만지며 그 뒷모습을 바라봤다. 입 맞춰진 손등이 화상이라도 입은 듯 뜨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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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걱 거리는 철제 문소리에 작게 눈을 찌푸리며 체육관 안으로 애신이 들어왔다. 오후의 따스한 햇볕 아래 부유하는 먼지들이 가득했다. 애신은 손사래 치며 먼지를 쫓으면서도 눈으론 동매를 찾았다. 스스로도 알 수 없는 이유로 미친 듯이 뛰는 심장과 화끈거리는 손등 덕분에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오늘 동매와 마주하면 그 이유를 알 것만도 같았다.
매트가 치워진 체육관은 처음 동매를 만났을 때보다 넓어 보였다. 이곳저곳을 둘러봐도 찾을 수 없는 동매의 모습에 밖으로 나가볼까 하던 애신의 귀에 성난듯한 말소리가 들렸다.
“…래서 장난하냐고.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진짜 짜증이 좀 나는데?”
“미안해. 네가 당황하는 게 너무 웃겨서 그랬어. 한 번만 봐주라 동매야아.”
체육관의 농구대 옆에 농구공 따위가 아무렇게나 담긴 커다란 수납장 뒤에 몸을 숨긴 애신이 눈만 빼꼼히 내놓고 소리가 나는 곳을 바라보았다. 작게 열린 문틈 사이로 두 사람이 보였다. 그리고 멱살이 잡혀 들려진 사람의 얼굴도 보였다. 김희성이었다. 그리고 멱살을 잡은 사람은 바로 구동매였다.
“이양화한테 가서 전해. 애신 선배한테 구동매랑 만나는 횟수를 더 늘려야 하지 않겠냐고 부추기라고.”
“아니 근데 동매야 우리 이렇게까지 해야 되는 거야? 그냥 고백하자. 고애신한테 내가 너 좋아한다고 하면 되는거 잖아”
애신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보였다가 보이지 않았다가 하는 동매의 얼굴을 쫓았다. 그때 순간 강하게 불어든 바람에 문이 활짝 열렸다.
“…그러기엔 내 주제에 너무 예쁘잖아.”
덤덤하게 말하는 동매의 얼굴이 보였다. 야유하는 희성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멱살을 다시 움켜잡는 동매도 보였다. 애신은 밤새 진정시킨 심장이 다시 미친듯이 뛰기 시작하는 것을 느끼며 어쩐지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막지 못했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