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랑비
이른 아침부터 해가 보이지 않는 회색빛 하늘로 물들어 안개가 자욱하더니, 오시(午時)가 되자마자 먹구름이 잔뜩 끼어 빗방울이 하나 둘 툭툭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보름을 하루 앞둔 날이었다. 동매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하늘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제 앞에 놓여진 옅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내일이면 자신과 마주보게 될 애기씨를 속으로 그리며 입 안 가득 퍼지는 차 특유의 깊은 맛과 그 끝에 감도는 쌉싸름함을 곱씹었다. 그렇게 사내는 일 없는 한가로운 어느 날처럼 찻집에서 홀로 꽤 오랜 시간을 따분하게 보내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수하에게 고가댁 애기씨가 진고개의 거처까지 찾아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 전 까지는.
동매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제 주변을 지키고 있던 수하들을 뒤로한 채 우산도 없이 밖으로 나가 걸었다. 오늘은 보름 하루 전날인데 애기씨께서 대체 무슨 연유로 저를 찾아 계시는 것일까. 혹여 무슨 일이라도 생기신 것일까. 평소보다 조금 더 넒은 보폭으로 걸었던 걸음은 곧바로 뜀박질로 변하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약간 굵은 알갱이정도로 떨어지던 빗방울들도 어느새 더 굵고 세차게 내리는 장대비가 되어 떨어져, 제 새까만 머리카락부터 붉은 기모노와 하카마까지 다 적셨지만 사내는 그런 것 따위 신경쓰지 않았다. 그저 차가운 빗방울들이 눈 앞을 가려 제 시야를 방해하는 것이 조금 성가실 뿐, 이미 사내의 온 신경과 관심은 제 거처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한 여인에게로 쏠려 있었다. 찻집에서 진고개 거처까지 가는 익숙한 길이 유난히 멀게만 느껴졌다.
찰박찰박, 흙탕물을 튀기며 진고개를 달려온 사내는 제 거처의 처마 밑에 놓여진 익숙한 가마를 본 후에야 겨우 걸음을 멈췄다. 이곳까지 달려오느라 잔뜩 흐트러진 매무새를 대충 정리하고, 거친 숨을 천천히 고르던 동매는 곧이어 축축한 손으로 제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처의 나무 문을 밀어젖혔다.
드르륵,
열린 문 너머에는 푸른색 장옷을 들고 서 있는 여인이 놀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애신은 인기척도 없이 문을 열어젖히고 나타난 동매를 보고 놀라 잠시 숨을 들이켰다 내쉬었다.
갑작스럽게 등장한 사내의 꼴은 말 그대로 엉망이었다. 축축하다 못해 가늘어진 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젖은 머리카락과 턱끝하며, 물기를 가득 먹어 꾹 쥐어짜면 물이 우수수 나올 것 같은 차림새 하며, 딱 보아도 제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는 가만 두면 당장 고뿔에 걸릴 모습이었다.
애신은 한숨을 작게 내쉬더니 동매가 말문을 트기도 전에 품에서 하얀 손수건을 꺼내 젖은 머리칼부터 부드럽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사내는 예상치 못한 행동에 놀란 듯 두 눈을 살짝 크게 떴다가 이내 괜찮다며 한 걸음 물러서려 했으나 여인이 제지했다.
" 뭐 그리 급하다고 달려왔는가. "
" 제게는 급한 일이었습니다. "
" 우산도 없이 이렇게 비를 다 맞고 와서야. 고뿔에 걸리기라도 하면 어찌하려고. "
" ...지금, 이 놈을 걱정해주시는 겁니까?
머리칼 끝에 달린 빗방울들을 손수건으로 마저 닦아내던 것을 멈춘 애신이 동매의 가라앉은 눈을 가만 바라보았다. 눈동자는 미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애신은 그 상태로 한참이나 묵묵히 있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내일은 일이 있어 자네를 만나기 힘들 것 같아 오늘 이리 급하게 찾아온 것인데, 내 이럴 줄 알았으면 자네에게 미리 연통을 넣어둘 것을 그랬군.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미안하네."
" ..오늘따라 제게 퍽 다정하게 구신다 했더니, 그 때문이었습니까. 됐습니다. 신경쓰지 마십시오. "
건조한 대답을 끝으로 대화는 끊어졌다. 여인은 머리칼 끝을 매만지던 손을 옮겨 잠깐 머뭇거리다가, 이내 물기로 촉촉해진 사내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았다. 얇은 천 너머로 느껴지는 감촉이 낯설다. 무의식적으로 짧게 난 수염이 있는 날카로운 턱과 살짝 그을린 피부, 도톰한 입술, 오똑한 코, 약간 치켜올라간 짙은 눈썹까지 눈에 담는 찰나에 동매의 까만 눈과 마주치자 당황한 애신은 급히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했다. 보름마다 마주보는 얼굴이건만 이렇게 가까이서 새삼 뜯어보니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지난 날의 사춘기 소녀라도 된 것 처럼.
동매 또한 평소와는 다른, 어딘가 낯선 애신의 모습에 괜히 눈 앞의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만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제 시선을 알아채고 최대한 눈이 마주치지 않게 애쓰는 여인이 눈에 훤히 보였지만 그래도 사내는 여인을 향한 집요한 시선을 쉽사리 거두지 않았다.
애신은 저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동매의 시선과 아까부터 자꾸만 간질거리는 마음에 이제 그만 물러나고 싶었지만, 혹시라도 저 때문에 사내가 고뿔에 단단히 걸릴까 싶어 생각처럼 선뜻 손을 거둘 수가 없었다. 결국 별 수 없이 어지러운 속마음을 애써 가다듬고 침착하게 손수건을 한번 더 접어, 사내의 턱 아래 목선을 따라 목덜미와 쇄골까지 흐르는 물기를 천천히 손수 닦아냈다. 시선 또한 마찬가지로 손을 따라 내려갈때 여인은 왠지 모르게 얼굴이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밖에 내리는 비 때문에 분명 주변 공기는 눅눅하고 습할 터인데, 사내와 가까이 마주하고 있는 이 공간 만큼은 묘한 열기로 후덥지근한 것 같았다. 동매 또한 애신의 지긋한 시선과 온기가 담긴 작은 손길이 제 몸에 닿을때마다, 속이 간지러워지고 아랫배가 점점 뻐근해지는 것을 느꼈지만 가까스로 인내를 거듭해 버티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여인이 쇄골을 적신 물방울까지 마저 닦고 있었을때, 순간 마른침을 삼킨 사내의 목울대가 울렁거렸다. 흠칫한 애신은 본능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날 뻔 했지만 간신히 참아냈다. 어느정도 젖은 부위를 다 닦아내고 남은 물기또한 서서히 말라갈 때 즈음, 애신이 손을 거둬 축축해진 제 손수건을 다시 품 안에 넣었다. 그때까지 애신이를 가만히 바라만 보는 양 있었던 동매가 언뜻 아쉬운 마음이 들었는지, 애신의 가느다란 손을 붙잡으려 했으나 바람과는 달리 그저 조용히 제 오른손만 허무하게 쥐었다 펼 뿐이었다.
" ..이쯤이면 되겠지. 고뿔 걸리지 않게 몸 관리 잘 하고. 여기 이달 치 몫이네. "
지난 보름날 유도장에서처럼 애신이 동전 한 닢을 쥔 손을 뻗어 내밀자, 동매는 말없이 애신을 향한 시선을 가만 둔 채로 팔만 움직여 동전을 건네받았다.
" ..나는 이만 가보겠네. 다음 보름에 또 보세. "
짧은 인사를 마치고 애신이 거처에서 나가려 할 때, 별안간 애신의 눈에 들어와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동매의 애달픈 눈빛이었다. 정말이지 볼때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이다. 저 자가 저런 눈빛을 하고 바라보면 항상 지금처럼 마음이 한 구석이 저려온다. 이렇게 모른 척 사내에게 뒷모습을 보여도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는 응어리가 끈질기게 남아서 제 속을 다 흐트려 놓았다.
애신은 괜스레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뒤돌아선 채로 입술을 꾹 깨물고 두 손을 꽉 쥐어 보기도 했지만, 끝내 코앞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그대로 걸음을 멈추었다. 동매는 그런 애신의 손목을 아프지 않게 붙잡았다.
" 가지마십시오, 애기씨. ...아직 비가 많이 내립니다."
말을 내뱉은 자신도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터무니 없는 핑계였다. 허나 이런 같잖은 이유를 대서라도 애기씨를 조금이라도 더 오래 제 곁에 두고 싶었다. 이런 욕심 어린 마음이 드는 것이 하루이틀 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오늘따라 저를 떠나려는 애기씨의 걸음을 붙잡고 싶은 것은 저 손길이 주는 다정함에 몸도 마음도 약해져 버렸기 때문이리라.
결국 한참이 지나서 애신은 몸을 돌려 동매와 마주했다. 동매 또한 애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곧이어 애신이 두 걸음 정도 더 가까이 다가와, 손수건으로 물기를 닦아준 것이 무색하게 땀방울을 흘려 조금 축축해진 동매의 목덜미를 맨 손으로 어루만졌다. 사내의 몸이 짧게 움찔거렸다. 역시 좀 전부터 묘한 열기를 느낀것은 비단 저 뿐만은 아니었구나. 애신은 흘러내린 옆 머리카락을 천천히 귀 뒤로 넘겨주며 동매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흑요석처럼 까만 두 사람의 눈동자에 서로가 비춰졌다.
" ...그럼, 비가 그칠 때 까지만 신세를 지도록 하겠네. "
애신의 나지막한 대답이 떨어지는 순간, 누구 먼저 하랄 것도 없이 홀린듯이 입을 맞추었다.
마치 불장난 같은 입맞춤이었다. 뚜렷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그 서글프고도 애달픈 눈빛을 위로해주고 싶어서, 괴로움을 등에 업고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는 대신 그저 함께 무너져 내리고 싶을 뿐이었다.
도톰한 아랫입술을 부드럽게 머금다 하얀 치열을 천천히 훑고, 다시 두 입술을 아프지 않게 깨물고 핥다가 붉은 혀를 끈적이게 옭아맸다. 그렇게 절대 작은 틈도 내어주지 않겠다는 듯 서로를 껴안고 서로의 입술을 미친듯이 탐했다. 시간이 제법 흘러서야 두 사람은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번진 입술을 잠깐 떼어내 가쁜 숨을 골랐다. 동매가 시선을 내려 살짝 부풀어 오른 애신의 입술을 엄지 손가락으로 가볍게 문지르자, 애신이 바로 발돋움을 하여 다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밖에서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 소리가 두 사람의 진득한 공간을 감추듯 가득 메웠다.